연속기고 숲에서 길을 묻다 : 세계사를 바꾼 20대 사건, 소설과 영화로 읽다 – ③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1968 전환의 시대’
: 예루살렘의 심판에서 파리의 상상력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한경수 회원 (민생경제위원회)

목차
프롤로그: 1968년 파리의 거리,베를린의 강의실 그리고 프라하의 광장까지
Ⅰ. 시대적 배경과 전개 – 모범생들의 반란에서 거리의 폭발까지
Ⅱ. 작가의 시선 –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마주한 같은 질문
1.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생각하지 않는 죄와 악의 평범성
2. 「책 읽어주는 남자」 – 관찰자로서의 실존적 딜레마
3.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역사의 무거움과 존재의 가벼움
Ⅲ. 감독의 시선 — 카메라가 포착한 시대의 얼굴
1. 「바더 마인호프」(2008) – 이상주의가 낳은 괴물
2.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2020) – 침묵을 강요당한 법정
3. 「몽상가들」(2003) – 상상력의 무한한 확장
Ⅳ. 68혁명의 유산 – 물려받은 자유, 그러나 상속되는 특권
에필로그 · 상상력이 왜 필요한가?
프롤로그
1968년 파리의 거리, 베를린의 강의실 그리고 프라하의 광장까지
“역사는 되풀이되지만 같은 얼굴로 오지 않는다.
가면의 모습과 상징은 바뀌지만, 그 안에 있는 얼굴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역사를 다시 읽는 것은 가면을 벗기고 그 얼굴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1961년, 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이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7년 뒤, 파리의 거리, 베를린의 강의실, 프라하의 광장이 태어났다.
예루살렘의 특별 법정 방탄유리 부스 안에 평범하게 생긴 한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았고, 그저 성실하게 서류를 처리하고,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 평범한 공무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는 바로 그 평범한 아저씨의 모습 속에서 20세기가 낳은 가장 섬뜩한 악의 얼굴을 발견했다. “말과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 — 이 한 문장은 전 세계 젊은 지성들의 심장에 지울 수 없는 균열을 냈다. 아이히만의 죄는 그가 악마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재판을 지켜본 이들 중에는, 이제 자신의 부모 세대를 향해 똑같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젊은 세대가 있었다. “당신들은 그때 무엇을 했습니까?”라고.
그로부터 7년의 시간이 지나, 1968년 봄 파리의 보도블록 위에서, 베를린의 강의실에서, 프라하의 광장에서, 도쿄의 캠퍼스에서 저항의 함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예루살렘의 법정이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거대한 악의 톱니바퀴가 되었는가”를 물었다면, 68세대는 그 질문을 정확히 뒤집어 “우리는 결코 그런 톱니바퀴가 되지 않겠다”고 전면적으로 선언하였다. 즉, 심판이 상상력을 잉태한 것이다. “상상력에 권력을”,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 인류사에 전무후무했던 이 슬로건들은, 생각하지 않는 순응이야말로 악의 온상이라는 예루살렘 재판의 뼈아픈 교훈에 대한 젊은 세대의 실존적 응답이었다. 이 응답은 파리와 베를린, 시카고, 프라하, 도쿄, 바르샤바, 멕시코시티, 카라치 등에서 각기 다른 사건을 계기로 시작되어 1968년을 ‘혁명의 해’로 만들었다.
본 서평은 바로 이 세 겹의 시선(1961년 예루살렘의 심판, 1968년 파리 등에서의 상상력, 그리고 그 사이와 이후에 남겨진 세대들의 실존)을 겹쳐가며 궤적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아이히만의 법정에서 시카고의 법정까지, 생각하지 않는 순응에 대한 경고에서 순응하지 않는 상상력의 폭발까지, 그리고 다시 그 상상력이 스스로의 심판대에 서기까지, 이 순환의 궤적을 되짚는 일은 역사적 회고에만 그치지 않는다.1) 그것은 반세기를 건너 2026년 오늘, 법의 언어로 사유하고 판단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우리 각자에게 던져진 하나의 질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느 법정과 어느 거리 사이에 서 있는가?
1) ‘68혁명’이 왜 발생했고, 각 나라별로 전개 과정과 그 결말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68혁명이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각 나라마다 어떤 영향을 미쳤고 이로 인해 그들이 살아가는 삶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모두 다루기엔 하나의 서평에서 감당할 수 없는 분량이다. 이런 이유로 이 서평에서는 전체적인 진행의 흐름과 그 이후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본 서평은 ‘68혁명’(최근에는 ‘68운동’이라는 용어가 다수 쓰임)을 3권의 책과 3편의 영화라는 매개체를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한계가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Ⅰ. 시대적 배경과 전개 – 모범생들의 반란에서 거리의 폭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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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체제라는 새로운 블랙홀 시대
# 1. 안도감과 수치감 그리고 국가이익 우선주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인류는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안았다.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전대미문의 야만이 패배했다는 안도감, 그리고 그 야만에 맞서지 않았거나 방조했던 자신들에 대한 수치심. 그러나 역사는 선의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승전국들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앞세우면서도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냉전 체제를 구축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했지만, 유색인종이 법적으로 차별받는 나라에서 그 자유는 반쪽짜리였다. 소련은 노동자 해방을 선언했지만, 당의 주류에 반대하는 세력은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다.
# 2. 형식적 법치주의
냉전 체제에서는 국가의 이익이 가장 우선시되었다. 이로 인해 법은 보편적 인간 존엄의 수호자로 기능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이익과 질서 유지의 도구로 전락했고,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의 형태로, 프랑스에서는 알제리 식민지 억압 통치로, 서독에서는 과거사 은폐로, 소련에서는 반체제 인사 처벌 형법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예외 없이 ’법’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법치의 이중성과 국가 폭력의 실상을 이 무렵에 보급된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두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게 되었다.
# 3. 대학생은 세 배로, 대학은 그대로 – 담아내지 못한 낡은 시스템
68세대의 특수성은, 이들이 체제 밖의 낙오자가 아니라 체제가 약속한 사다리를 가장 성실하게 타고 올라간 모범생들이었다는 데 있다. 전후 고도성장이 낳은 풍요 속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된 첫 세대. 그런데 정작 그들을 맞이한 대학이라는 공간 자체가, 이 폭발적인 팽창을 감당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프랑스의 대학생 수는 1950년 약 13만 명에서 1968년 50만 명으로, 18년 만에 거의 4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러나 대학의 구조는 여전히 19세기 나폴레옹 시대에 정립된 엘리트주의·관료주의에 머물러 있었다. 강의실은 정원의 몇 배를 초과하는 학생들로 넘쳐났고, 교수는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가진 존재로 군림했으며, 학생은 학사 운영에 어떤 발언권도 갖지 못했다.
서독 역시 대학생 수는 1950년 약 10만 4천 명에서 1968년 31만 명 이상으로 세 배 가까이 늘었다. 그러나 서독의 대학은 정교수 한 명이 모든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늘어난 학생을 수용할 강의실도 새로운 교수도 마련되지 않았으며, 학생들은 학사운영에 어떤 발언권도 없었다. 무엇보다 정교수 중에는 나치에 협력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가르칠 자격이 있는가?’라는 도덕적 정당성 문제도 있었다.
미국도 대학생 수가 1950년 약 240만 명에서 1960년 360만 명, 1970년 750만 명으로 20년 사이 3배 넘게 늘었다. 다만, 미국의 경우에는 대학생에게는 징집을 유예해 주어 베트남전이 격화되면서 징집을 피하기 위해 대학생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유럽에서 대학 팽창이 ‘수용 능력의 붕괴’로 나타났다면, 미국에서는 ‘누가 대학에 갈 수 있는가’가 곧 ‘누가 전장에 끌려가지 않는가’를 가르는 문제였다.
전후 고도 성장의 풍요 속에서 대학에 진학한 첫 세대였고, 지적으로 각성한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들이었던 68세대 청년들, ‘모범생들’은 부모세대가 약속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더니, 그 사다리 꼭대기에 있던 것은 여전히 낡은 권위와 불충분한 자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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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 나치 청산의 실패에서 두 갈래 길까지
# 1. 나치 과거 청산의 실패 – 세 번의 재판이 새긴 배신감
독일 청년들의 가슴 속을 지배한 가장 큰 분노는 전후 서독 사회가 이룩한 풍요 뒤에 숨겨진 ‘과거사 청산의 실패’였다. 그러나 이 실패는 막연한 정서가 아니라, 68혁명 직전 10년 사이 벌어진 세 차례의 구체적인 재판을 통해 청년들의 눈앞에서 하나씩 실증되었다.
첫 번째는 1958년 울름 아인자츠그루펜 재판이었다. 이는 국제군사재판이 아니라 서독 국내법으로 진행된 최초의 나치 범죄 재판으로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 5천여 명을 학살한 아인자츠코만도 소속원 10명이 기소되었다. 이 재판이 중요한 이유는, 뉘른베르크 재판(1945~49)이 이미 나치 문제를 ‘종결’시켰다고 믿고 있던 서독 사회에 “학살에 가담한 자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서 평범한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폭로했다는 데 있다.2) 이 재판의 여파로 나치 범죄 전담 수사기구인 루트비히스부르크 중앙수사국이 신설되었다.
2) 뒤에서 보게 될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가 다루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 재판이었다. 재판은 독일 국내에서 열린 것이 아니었음에도 서독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을 참관하고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학살의 설계자가 광신적 괴물이 아니라 그저 상부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한 관료였다는 이 통찰은, 독일 청년들에게 “그렇다면 내 아버지, 내 삼촌, 내 담당 교수도 그런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훨씬 더 섬뜩하고 사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세 번째는 (패전 후 18년이 지난) 1963년부터 1965년까지 183일간 진행된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이었다. 헤센주 검찰총장 프리츠 바우어가 주도한 이 재판은 아우슈비츠 생존 SS 요원 약 8,200명 가운데 단 22명만을 기소하는 데 그쳤지만, 250명이 넘는 생존자와 수용소 관계자의 증언이 공개 법정에서 낱낱이 다뤄지면서 아우슈비츠의 실체가 서독 대중에게 처음으로 상세히 전달되었다.3) 역사학자들이 훗날 이 재판을 “독일 대중에게 각인된 유일한 역사 수업”이라 평가할 만큼, 수백만 젊은 독일인들의 의식을 뒤흔든 사건이었다.
3) 기소된 22명 중 2명은 재판 도중 사망했고, 나머지 20명 중 종신형 6명, 3년 3개월~14년 유기징역 11명, 무죄 3명이었다. 당시 서독 형법상 정범으로 처벌하려면 ‘구체적·개별적 살인행위’의 직접 입증이 필요했다는 점이 이례적으로 낮은 형량의 배경이다.
그러나 이 세 재판이 남긴 것은 각성만이 아니었다. 재판부는 피고인 대다수를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인 방조범”으로 규정했고, 이는 역설적으로 “정상적인 독일인과는 다른 소수의 괴물들이 저지른 일탈”이라고 판단하였다. 아우슈비츠 재판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서독 국민의 57%가 “추가적인 나치 재판에 반대한다”고 답했다는 사실은, 청년들에게 국가가 과거를 직면하는 척하며 실제로는 그것을 다시 봉인하려 한다는 이중의 배신감을 안겼다.
안방에서는 부모 세대의 침묵과 마주하고, 법정 기록과 신문 지면에서는 이웃이었을지 모를 이들의 이름이 하나씩 드러나고, 그럼에도 사회 전체는 여전히 “이제 그만 덮자”는 여론이 다수였던 이 모순적 풍경 속에서, 68세대 청년들은 부모세대를 향해 도덕적 전면전을 선언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학살의 공범이었던 당신들이 어떻게 법과 도덕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시작되어 아우슈비츠 재판을 거쳐 완성된 이 질문이야말로, 독일 68혁명을 프랑스 68혁명과 구별 짓는 가장 고통스럽고 실존적인 특수성이었다. 이 배신감이 실제로 거리로 터져 나오기까지, 서독 사회는 이미 다른 방향에서도 압력솥처럼 끓고 있었다.
# 2. 아데나워 체제와 의회외부저항운동 – 오네조르크의 죽음
전후 서독을 이끈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장기 집권은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을 가져왔지만, 사회적으로는 극도의 보수주의를 고착시켰다. 아데나워가 다진 보수적 기반위에서 1966년 후임 키징거 총리 시절 기독교민주연합과 사회민주당이 손을 잡은 ‘대연정’은 젊은 세대에게 결정적인 절망을 안겼다. 의회 내에서 정권을 견제할 실질적 야당이 사라지자, 청년들은 의회 밖에서 저항을 조직했다. 이것이 ‘의회외부저항’(APO) 운동의 시작이었다.
이 저항은 추상적인 구호에 머물지 않고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서독 68혁명의 불꽃은 프랑스보다 1년 앞서 타올라다. 1967년 6월 2일, 서베를린을 방문한 이란 국왕 반대 시위에 참여했던 대학생 베노 오네조르크가 경찰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비무장 학생이 국가 권력에 의해 살해된 이 사건은 서독 전역의 청년들을 각성시켰다. 나치 청산의 실패가 심어 놓은 배신감은 이렇게 국가 폭력이라는 구체적 얼굴을 얻었다.
# 3. 두치케 암살 미수와 슈프링어 언론권력
1968년 4월, 독일 68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루디 두치케가 우익 청년 요제프 바흐만의 총격으로 머리에 치명상을 입었다. 두치케는 수술 끝에 살아남았지만 후유증으로 1979년 세상을 떠났다. 학생들은 두치케 암살 미수의 배후로 시위를 왜곡 보도하며 증오를 부추겼던 보수 언론 재벌 ’악셀 슈프링어’를 지목했다.
독일 68혁명에서 언론 권력에 대한 저항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악셀 슈프링어 출판사는 당시 서독 전체 신문 발행 부수의 약 40%를 장악하고 있었다. 슈프링어 계열 신문들은 학생 운동가들을 ‘폭력배’,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며 68혁명에 적대적인 여론을 만들어냈다. 오네조르크 피격 사건 당시에도 슈프링어 계열 신문들은 피격된 학생보다 경찰을 감싸는 보도를 했다. 학생들의 슈프링어 본사 앞 시위와 인쇄 트럭 방화는 단순한 폭력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독점적 언론 권력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왜곡하는지에 대한 저항이었다.
# 4. 비상사태법 – 추진에서 통과, 그리고 좌절까지
두치케 저격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서독 정부는 국가 비상사태 시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비상사태법’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이 법안은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린 ‘전권위임법’(1933년)의 악령을 연상시켰다. 역사적 트라우마가 법적 저항 의식으로 전환된 것이다.
‘의회외부저항운동’은 전국적 총파업과 대규모 시위를 조직해 법안 저지를 시도했으나, 연방의회는 5월 30일 마침내 이 법을 통과시켰다. 학생들에게 이것은 1933년 히틀러에게 전권을 부여한 수권법의 재림으로 읽혔다. “아버지 세대가 막지 못한 일을 우리는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프랑스처럼 노동계와의 연대를 통해 정치적 승리를 거두지도, 요구가 관철되지도 못하였다. 청년들은 “합법적 절차로는 이 체제를 바꿀 수 없다”는 노선과 “그래도 제도 안에서 싸워야 한다”는 노선 사이에서 갈라서기 시작했다. 이 지점이 서독 68운동의 정치적 정점이자 동시에 붕괴의 시작이었다.
# 5. 두 갈래 길 – 적군파와 두치케 노선의 갈림
이 좌절 이후 운동은 뚜렷이 두 갈래로 분열됐다. 하나는 안드레아스 바더와 울리케 마인호프가 이끈 적군파의 무장투쟁 노선으로 “말만 하는 시대는 끝났다”며 당시 자본주의의 심장이었던 백화점 방화와 테러로 치달아 68혁명의 이상주의를 폭력으로 이끌었다. 다른 하나는 두치케 자신이 제창한 “제도권을 통한 긴 여정”으로, 대학과 언론, 정당 내부로 스며들어 체제를 서서히 개혁하는 길이었다. 이 노선은 1969년 사민당 빌리 브란트의 집권으로 정치적 결실을 맺었고, 1970년 바르샤바에서 브란트가 무릎을 꿇은 사죄는 과거사 청산의 상징적 완성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이 노선은 1980년 녹색당 창당으로 이어져 탈원전·평화주의·환경운동이라는 장기적 유산을 남겼다. 결국 서독 68혁명은 단기적으로는 정치적으로 패배했지만, 무장투쟁이라는 가장 어두운 그늘과 녹색당이라는 가장 밝은 결실을 동시에 낳은, 극단으로 갈라진 두 개의 결말을 남긴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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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위대한 사회’의 모순에서 닉슨의 당선까지
# 1. ’위대한 사회’의 모순 – 복지와 전쟁, 인종 분리의 현실
1963년 케네디 암살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존슨은 ‘위대한 사회’라는 기치 아래 메디케어·메디케이드 도입, 빈곤과의 전쟁, 민권법(1964)과 투표권법(1965) 제정을 밀어붙인 20세기 미국 복지국가의 설계자였다. 그러나 그는 베트남 전쟁을 전면전으로 확전시킨 인물이기도 했다. 1963년 취임 당시 1만 6천 명이었던 주둔군은 1968년 55만 명으로 불어났다. 복지와 전쟁을 동시에 추진한 이 모순은 미국 68세대에게 가장 깊은 배신감을 안겼다. ‘위대한 사회’의 이상과 정글에서 벌어지는 학살의 현실이 같은 정부, 같은 예산, 같은 세대의 아들들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배신감은 인종의 영역에서 더욱 노골적이었다.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이 통과되었음에도, 흑인 청년들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사실상의 주거 분리와 교육 격차, 경찰 폭력이 존재했다. 2차대전에서 나치즘과 싸워 “세계에 민주주의를 전파했다”는 기성세대의 자부심은, 정작 자국 안에서는 실현되지 않은 약속이었다. 법조문의 존재와 법의 지배의 실현 사이의 이 간극이야말로, 미국 68혁명이 법률가에게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 2. 징병제와 세대의 배신감
백인 중산층 남학생들은 징집이라는 훨씬 더 직접적이고 육체적인 위협 앞에 놓여 있었다. 대학 재학은 징집을 유예받는 합법적 방편이었지만, 대학에 갈 형편이 안 되는 가난한 백인과 흑인 청년들은 그대로 전장으로 끌려갔다. “투표권은 없지만 징집은 당한다”는 모순이야말로 법 앞의 평등이라는 헌법적 약속과 현실 사이의 가장 노골적인 간극이었다. 복지와 전쟁,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차별 사이의 이 모순들은 1968년 한 해 동안 세 국면의 충격파로 미국 사회를 강타했다.
# 3. 구정 대공세와 존슨의 몰락 (1~3월)
북베트남군이 1월 30일 남베트남 전역 100여 개 도시를 동시다발적으로 기습한 구정 대공세가 발발했다. 미군이 군사적으로는 결국 이를 격퇴했지만, “베트남에서 승리하고 있다”던 존슨 행정부의 말이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되면서 거짓말임이 드러나고 말았다. 특히 사이공 주재 미국 대사관까지 일시 점거되는 장면이 생중계되며 미국 대중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전쟁 반대’를 내건 매카시 후보가 예상 밖의 선전을 거두자, 3월 31일 존슨 대통령은 전국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전격적으로 대통령 재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 4. 두 번의 총성과 시카고의 여름 – 킹 목사에서 전당대회까지 (4~8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4월 4일 멤피스의 로레인 모텔 발코니에서 제임스 얼 레이의 총격으로 암살되었다. 비폭력 저항 노선의 상징적 지도자가 쓰러지자, 워싱턴 D.C를 비롯한 전국 100여 개 도시에서 대규모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민권법(1964)과 투표권법(1965)이 이미 통과되었음에도 흑인 사회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누적된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2차대전에서 나치즘과 싸워 세계에 민주주의를 전파했다는 나라에서, 우리는 여전히 버스 뒷좌석에 앉는다”는 목소리가 이 시기 청년 흑인 세대를 대변했다. 워싱턴에서는 백악관 인근까지 화염과 최루탄 연기로 뒤덮였고, 연방 군대가 다수 도시에 투입되는 사태로 번졌다.
두 달 뒤, 민주당 경선에서 반전·민권 진영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떠오른 로버트 케네디마저 쓰러졌다. 인디애나·네브래스카 경선을 연달아 승리하며 대세를 굳혀가던 그는 6월 5일 캘리포니아 경선 승리를 자축하던 직후 로스앤젤레스 앰배서더 호텔에서 팔레스타인계 청년의 총격을 받고 이튿날 사망했다. 두 달 사이 킹과 케네디, 즉 흑인 민권운동과 반전 운동을 각각 대변하던 두 인물이 연이어 총탄에 쓰러지면서, 청년 세대 사이에는 “합법적 정치 변화의 통로 자체가 막혀버렸다”는 깊은 절망감이 확산되었다. 총과 폭력이 투표와 토론을 대신할 수 있다는 위험한 신호가 사회 전체에 각인되었다.
이 정서적 뇌관은 8월 시카고에서 폭발했다. 8월 26일부터 29일까지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맞춰, 약 1만 명의 반전 시위대가 그랜트 파크에 집결했다. 리처드 데일리 시장이 동원한 경찰과 주방위군 2만 3천여 명이 이들과 대치했고, 8월 28일 밤 경찰은 시위대뿐 아니라 취재기자와 행인까지 무차별적으로 곤봉으로 구타했다. 이 장면은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시위대는 “온 세상이 지켜보고 있다”를 연호했다. 대회장 내부에서도 민주당은 반전파(매카시·매거번 지지)와 친정부 주류파(부통령 험프리 지지)로 완전히 분열되어 있었다. 이후 시위를 조직한 혐의로 애비 호프먼, 톰 헤이든 등 8명(재판 과정에서 7명으로 축소)이 기소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영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의 배경이다. 국가 권력이 형사재판이라는 합법적 외피로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하려 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 5. 닉슨의 당선과 그 후 변화의 시작 (11월 이후)
민주당이 시카고에서의 분열상을 여과 없이 노출한 대가는 컸다. 11월 대선에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민주당 험프리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법과 질서’를 내세운 닉슨의 승리는 68혁명이 단기적 정치 지형에서는 오히려 보수 진영에 승리를 안겨주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같은 미국 땅에서 청년들이 남긴 것이 이 정치적 패배와 균열만은 아니었다. 시카고의 여름으로부터 꼭 1년 뒤인 1969년 8월, 뉴욕주 베델 근교의 한 농장에는 40만 명이 넘는 청년들이 모여 사흘간 ‘평화와 음악의 축제’(Woodstock)를 열었다. 총과 곤봉이 오갔던 시카고의 거리와 달리, 이곳에는 국가 권력과 충돌할 아무런 대상도 없었다.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지미 헨드릭스가 홀로 연주한 미국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였다. 그는 디스토션과 피드백으로 국가의 선율 위에 폭격기와 총성을 연상시키는 소음을 겹쳐 놓았다. 말이 아니라 소리로 베트남전에 대한 저항을 새겨 넣은 셈이었다.
다만 이 잠정적 유토피아는 오래가지 않았다. 넉 달 뒤인 그해 12월, 캘리포니아 알타몬트 스피드웨이에서 열린 롤링스톤스의 무료 콘서트에서는 경호를 맡은 폭주족 헬스 엔젤스가 관객 한 명을 흉기로 찔러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4) 같은 ‘평화와 음악의 축제’라는 구상 아래 기획되었으나 정반대의 결말을 맞은 이 사건은, 우드스톡이 보여준 유토피아가 특정한 시공간의 우연한 산물이었을 뿐, 재현 가능한 것도 지속 가능한 것도 아니었음을 곧바로 드러냈다.
무대 위의 열기와 거리의 함성이 이렇게 한 시절의 신기루로 꺼져가는 동안에도, 법과 제도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더디지만 확실한 변화가 뒤따르고 있었다. 1970년에는 환경보호청이 창설되고, 1971년 수정헌법 제26조로 투표 연령이 21세에서 18세로 낮아졌으며, 1972년에는 타이틀 나인(모든 연방 교육기관에서 남녀 차별금지)과 남녀평등헌법수정안이 의회를 통과(각 주 비준 정족수에는 미달되어 발효되지는 못했다)했다. 1973년에는 징병제 자체가 폐지되어 모병제로 전환되었고, 같은 해 로 대 웨이드 판결로 임신 초기 낙태에 대한 여성의 헌법적 권리가 인정되었다.5)
4) 영상의 마지막 장면에서 믹 재거는 쓸쓸하게 편집실을 나서는데 그 위로 롤링 스톤즈의 명곡 ‘Gimme Shelter’가 흘러나온다. 이 사건은 1960년대 평화와 사랑을 외치던 히피 문화 및 록큰롤 유토피아가 비극적으로 종료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5)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수정헌법 제14조의 적법절차 조항이 보장하는 ‘사생활에 대한 권리’에 임신 중지를 결정할 여성의 권리가 포함된다고 판시했다. 임신 기간을 3분기로 나누어 임신 초기(1분기)에는 국가가 이를 규제할 수 없고, 중기 이후로 갈수록 태아의 생존 가능성과 산모의 건강을 이유로 한 규제의 정당성이 커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판결은 2022년 「돕스 대 잭슨 여성보건기구」 판결로 공식 폐기되었다. 그 이후로 낙태 문제는 각 주 의회와 유권자들이 결정할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2026년 11월에도 아이다호 주를 비롯한 4개 주에서 낙태 관련 투표가 예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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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 드골 체제의 불평등에서 정치적 패배까지
# 1. 드골 체제와 ’영광의 30년’이 감춘 불평등
1968년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샤를 드골 대통령이 이끄는 제5공화국 체제 하에 있었다. 1958년 알제리 위기 속에서 강력한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제정하며 등판한 드골은 10년 동안 프랑스를 통치하고 있었다. 국영 방송(ORTF)은 철저한 보도 검열로 정권의 나팔수가 되었고, 제5공화국의 헌법 구조는 의회를 약화시키고 대통령에게 막대한 권력을 집중시켰다. 대학 기숙사의 남녀 상호 출입 금지를 법으로 규정한 것, 여성이 남편의 동의 없이 은행 계좌를 개설할 수 없었던 것 등은 단순한 낡은 관습이 아니라, 법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 제도적 폭력이었다.
이 권위주의는 경제적 풍요 속에서 더욱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전후 프랑스는 “영광의 30년”(1945~1975)이라 부르는 고도 경제 성장기를 구가했다. 연평균 5% 이상의 성장, 자동차·TV·세탁기의 대중화. 그러나 풍요는 결코 공평하지 않았다. 포디즘(Fordism)적 대량 생산 시스템 속에서 노동자들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했다. 생산성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실질 임금 상승은 그 뒤를 따라가지 못했고, 주거 비용은 치솟았다. 경제 성장과 분배 정의는 자동으로 함께 오지 않았다. 이것이 1968년 프랑스 노동자들이 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나서게 된 구조적 원인이었다.
# 2. 베이비붐 세대의 반란 – 난테르에서 소르본까지
앞서 살펴본 대학 팽창의 충격은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가장 격렬하게 터졌다. 특히 파리 외곽에 급조된 난테르 캠퍼스는 이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응축된 공간이었다. 공업지대 한복판에 세워진 이 대학의 전근대적인 규율은 저항의 불씨가 되었다. 더 깊은 곳에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전후 프랑스 사회는 드골주의 아래 “우리는 모두 레지스탕스였다”는 국가적 신화를 창조했다. 그러나 나치에 협력한 비시 괴뢰정권의 죄악은 침묵 속에 묻혔다. 지성적으로 성장한 베이비붐 세대는 이 기만을 꿰뚫어 보았다. “가장 끔찍한 학살이 일어날 때 당신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실존적 질문이 기성 권위 전체에 대한 전면적 거부로 폭발했다.
이 거부는 1968년 3월 22일, 파리 외곽 난테르(Nanterre) 대학에서 구체적 사건으로 터져 나왔다. 다니엘 콘벤디트를 비롯한 학생들이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기숙사 내 남녀 상호 출입 금지 학칙 철폐를 주장하며 대학 본부를 점거했다.6) 정부는 대학을 폐쇄하면서 강경책으로 맞섰는데, 불길은 오히려 프랑스 지성의 상징인 파리의 심장부 소르본 대학으로 옮겨붙었다.
6) 관련 사진 자료는 구글 Arts & Culture ‘The May Events’에서 볼 수 있다.
# 3. 바리케이드의 밤에서 1,000만 총파업으로
5월 3일 소르본에 경찰 기동대가 투입되어 무차별 폭력 진압을 하게 되자, 파리의 카르티에 라탱 일대는 전쟁터로 변했다. 학생들은 거리의 보도블록을 뜯어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5월 10일 밤, ‘바리케이드의 밤’ 동안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이 장면이 라디오로 전국에 중계되면서 여론은 완전히 학생들 편으로 돌아섰다. 7) 학생들은 대학 본부를 점거하고, 도로를 봉쇄하여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는 등 공공재를 훼손하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도시 내의 바리케이드는 1830년, 1832년, 1848년 그리고 1871년에도 있었던 낯설지 않은 방식이었고, 이 과정에서 오히려 국가 권력의 과잉 진압이라는 더 큰 ’불법’을 폭로하게 되었다.
7) 당시 프랑스 국영방송은 드골 정부의 언론 통제로 인해 파리 한 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사건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여론이 반전되자 프랑스의 양대 노총8)은 5월 13일 학생들과의 24시간 연대 총파업을 선언했고, 주최측 주장으로 약 100만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양대 노총이 주도한 1일 파업은 그렇게 끝났지만, 양대 노총의 예상과는 달리 다음 날 낭트에 있는 항공기 공장에서부터 시작해서 국영기업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자주관리를 주장하기 시작했고(당시 프랑스는 정치를 비롯해 기업에서도 권위주의가 매우 강한 사회였다), 5월 16일에는 프랑스민주노동동맹(CFDT)도 자주관리 요구를 내걸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5월 22일에는 약 1,000만명이 총파업에 참여하게 되었다(당시 프랑스 전체 인구가 약 4,970만명이었고, 경제활동인구가 약 2,000만명이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공장, 철도, 항공, 행정, 방송까지 국가 시스템 전체가 마비되는 국가 기능 정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8) 프랑스의 양대 노총은 노동총동맹(CGT)과 프랑스민주노동동맹(CFDT)이다. 노동총동맹(CGT)은 1895년에 설립된 1대 노총이었고 당시 정통적 좌파 노선이 강했다. 한편, 프랑스민주노동동맹(CFDT)은 1964년에 설립되었고 신좌파 성향(반공산주의)이 강했다.
여기서 ’자주관리’란, 공장의 관리구조 및 결정구조를 민주화하고 기관에서의 권한 독점을 해제하기 위한 주장을 말한다. 타율적인 대상이던 노동자가 민주적 자기결정에 따른 자율성을 되찾고자 시도한 것이었다. 자주관리 요구는 전통 산업분야가 아니라 성장 산업에서 주로 20대의 젊은 노동자들이 주축이어 요구하였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전국단위 대표기구를 조직하려고 하자, 프랑스 공산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노동총동맹(CGT)은 5월 25일부터 27일까지 마라톤 협상을 벌여 정부와 그르넬 협약(최저임금 35% 인상 등)을 체결하고 확산을 방지하려고 하였고 프랑스민주노동동맹(CFDT)도 이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그르넬 협약안은 조합원들로부터 거부당했다. 역설적이게 양대 노조가 젊은 노동자들의 자주관리 요구를 가로막은 것이다.
# 4. 시네마테크에서 예술과의 결합
68혁명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예술과 정치가 분리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앙리 랑글루아 관장을 강제 해임하려 하자, 장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 누벨바그의 거장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5월 15일에는 학생들과 예술가들이 오데옹 국립극장을 점거하고, 부르주아들의 전유물이었던 이 공간을 24시간 개방된 ‘인민 토론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자주관리’ 구호가 예술계로 확장된 것이다.
학생과 예술가들이 결성한 ’인민회화공방’은 개인의 저작권을 거부하고 공동 토론을 통해 매일 밤 수천 장의 실크스크린 포스터를 찍어 파리 전역에 붙였고, 거리에는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모든 힘은 상상력에” 등의 낙서가 쓰여졌다. 그리고 청년들은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 〈Non, Je Ne Regrette Rien〉를 마치 68혁명의 비공식 주제가로 불렀다.
# 5. 정치적 패배, 그러나 변화의 시작
5월 말, 드골 정부는 붕괴 직전이었다. 드골은 5월 29일 갑자기 엘리제궁을 떠나 서독 바덴바덴의 프랑스군 기지를 극비리에 방문해 군의 충성을 확인하였다. 군의 충성을 확인한 그는 파리로 돌아와 30일 밤 라디오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어떻게 되겠냐”는 공포감을 교묘하게 자극하며 의회 해산과 새 선거를 선언했다. 이 발표로 인해 거리의 열정은 급격하게 식어버렸고, 다음 날 드골 지지자 50만 명 이상이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드골은 6월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487석 중 352석)를 거뒀다. 68혁명은 이렇게 ‘정치적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드골은 다음 해인 1969년 4월 27일, 지방분권 확대와 상원 개혁을 묻는 국민투표를 제안하면서 자신에 대한 신임 투표로 배수진을 쳤다. 국민투표는 “드골이냐 아니냐”로 변질되었고, 투표 결과 약 53%의 반대로 부결되면서 드골은 사임하였다. 그 이후 프랑스는 완전히 다른 사회가 되었다. 1975년 낙태죄 폐지, 가족법 개정, 대학 민주화법이 뒤를 이었고, 페미니즘·환경운동 같은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결국 68년에 정치적으로는 패배했지만, 프랑스 사회를 변화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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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의 3국 3색
1968년 파리와 베를린, 그리고 시카고의 혁명은 같은 해, 같은 세대의 청춘들이 일으켰지만 그 양상은 판이하게 달랐다. 프랑스의 혁명이 뜨겁고 낭만적이었다면, 독일의 혁명은 더 무겁고 도덕적이었고, 미국은 가장 폭력적이고 가장 분열적이었다.
파리의 청춘들은 ’지금 이 순간’의 자유를 노래했다. 그들의 슬로건은 시적이고 상상력이 넘쳤다 – “해변 아래에 모래밭이 있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반면 베를린의 청춘들은 ’과거에 대한 청산’을 요구했다. 그들의 물음은 더 어둡고 무거웠다 – “아버지, 당신은 나치 시대에 무엇을 하였나요?”. 프랑스 혁명이 해방의 축제라면, 독일 혁명은 속죄의 투쟁이었다. 그리고 시카고의 청춘들은 애초에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흑인 청년들은 “약속된 자유는 어디 있는가?”를 물었고, 백인 중산층 학생들은 “왜 나는 이 전쟁에 끌려가야 하는가”를 물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분노가 같은 여름, 같은 거리에서 충돌했다. 미국 혁명은 축제도 속죄도 아닌, 균열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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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여덟 나라 — 총성, 탱크, 그리고 파업

1968년 지구 곳곳에서는 비슷한 듯 전혀 다른 저항이 동시다발적으로 타올랐다. 이탈리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일본, 파키스탄, 멕시코, 브라질. 이 여덟 나라를 관통했던 흐름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여덟 나라는 크게 네 갈래로 나뉘었다. 동유럽의 세 나라는 ‘자유의 요구’였다. 폴란드는 연극 한 편의 상연 금지가 반유대주의 캠페인으로 번져 수만 명이 나라를 등졌고9), 체코슬로바키아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20만 소련군의 탱크 앞에 스러졌으며10), 유고슬라비아는 티토가 초기 진화에 성공했지만 자주관리 사회주의의 균열을 노출시켰다11). 파키스탄·멕시코·브라질은 ‘권위주의 정권 자체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파키스탄은 전 계층 봉기로 아유브 칸을 끌어내렸고12), 멕시코는 올림픽 개막 열흘 전 틀라텔롤코 광장에서 학생들에게 총구를 겨눴으며13), 브라질은 강경화의 제도법 제5호로 ‘납의 시대’를 열었다14). 이탈리아는 노동계와 결합해 ‘뜨거운 가을’의 대규모 파업 끝에 노동자헌장 제정이라는 프랑스와 유사한 제도적 성과를 거둔 반면15), 일본의 전공투는 야스다 강당 공방전 이후 내부 분열로 와해되어 문화적 유산만 남기고16),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로 흐르게 되었다.
9) 1968년 1월 반러시아적 연극 『지아디』 상연 금지에 항의한 시위가 3월 바르샤바 대학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하자, 정부는 이를 ‘시온주의자 음모’로 몰아 반유대 캠페인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수천 명이 제적·투옥되었고, 유대계 폴란드인 약 1만 3천~2만 5천 명이 나라를 떠났다.
10) 1968년 1월 알렉산드르 둡체크 집권 이후 8개월간 검열 완화와 언론 자유 확대가 진행되었으나, 8월 20~21일 소련이 주도한 바르샤바 조약군 20만 병력이 침공하며 종결되었다. 둡체크는 1969년 실각했고, 1969년 1월 대학생 얀 팔라흐가 항의 분신자살했다.
11) 1968년 6월 2일 베오그라드에서 취소된 공연을 둘러싼 학생-경찰 충돌을 계기로 베오그라드 대학생들이 7일간 파업에 돌입했고, 사라예보·자그레브·류블랴나로 확산되었다. 티토는 초기 강경 진압 이후 학생 요구를 일부 수용해 조기 진화하였다.
12) 1968년 10월 아유브 칸의 집권 10주년 자축 행사가 오히려 빈부격차에 대한 분노를 촉발해 전 계층 봉기로 번졌고, 1969년 3월 총파업 끝에 아유브 칸이 사임했다. 후임 야히아 칸 정권이 1970년 12월 실시한 첫 총선에서 동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의 아와미 연맹이 과반 의석으로 승리했으나, 서파키스탄 군부가 정권 이양을 거부하자 1971년 동파키스탄은 독립을 선언했다. 파키스탄군의 유혈 진압은 9개월 내전으로, 다시 방글라데시 독립으로 귀결되었다. 1968년 봉기가 이끌어낸 ‘유일한 정권교체’는 3년 뒤 국가 분단이라는 더 큰 격변으로 이어진 셈이다.
13) 1968년 10월 2일, 멕시코시티 올림픽 개막 10일 전 틀라텔롤코 광장에서 평화 시위 중이던 학생들에게 정부군과 저격수가 발포해 최소 20명에서 수백 명이 사망했다(정확한 수치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정부는 즉시 언론을 통제해 진상을 은폐했고, 30년 뒤인 1998년에야 의회 진상조사가 승인되었다.
14) 1968년 3월 리우데자네이루 학생 시위대 총격 사망을 계기로 저항이 확산되자, 군사정권은 12월 제도법 제5호(AI-5)를 발동해 의회를 폐쇄했다. 이후 수백 명이 고문·실종당하고 언론·문화계 전반이 검열당한 이 시기를 흔히 ‘납의 시대’라 부르는데, 총탄과 처형을 뜻하는 동시에 빛조차 통과시키지 않는 무거운 금속이라는 이중적 함의를 담고 있다. 민주화는 1985년에야 이루어졌고, 카에타누 벨로주 등이 주도한 트로피칼리아 운동(전통음악과 서구 록을 결합한 검열 저항 문화운동)이 이 시기의 문화적 저항으로 남았다.
15) 1969년 9월부터 50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참여한 ‘뜨거운 가을’ 파업(440시간 이상)을 거쳐 1970년 노동자헌장이 제정되었다. 다만 급진 좌파 일부는 붉은 여단으로 이탈했고, 같은 해 12월 밀라노 폰타나 광장 폭탄테러(17명 사망)를 시작으로 장기 정치테러 국면으로 변질되었다.
16) ‘전공투 세대'(1965~1972년 대학 시절, ‘단카이 세대’로도 통칭)의 문화적 유산으로는 무라카미 류의 「69」,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같은 문학, 오시마 나기사의 「신주쿠 도둑 일기」, 와카마쓰 고지의 「실록 연합적군」 같은 영화, 그리고 ‘포크의 신’ 오카바야시 노부야스의 반전 포크송이 남아 있다.
특히 멕시코·파키스탄·브라질 세 나라는 앞서 살펴본 서방 3국(프랑스·서독·미국)과 뚜렷이 갈렸다. 프랑스·서독·미국에서는 형식적 법치가 실질적 정의를 배신했다는 것이 청년들의 분노였다면, 이 세 나라에서는 국가가 애초에 형식적 법치의 외피조차 두르지 않고 학생들에게 직접 총구를 겨눴다. 법의 이름으로 억압이 자행된 사회와, 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 – 같은 1968년이었지만, 청년들이 마주한 폭력의 얼굴은 그만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Ⅱ. 작가의 시선 –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마주한 같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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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생각하지 않는 죄와 악의 평범성
“파리의 청년들이 바리케이드를 쌓기 5년 전,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훨씬 더 위험한 것을 이미 던져 놓고 있었다 – 생각하기를 멈춘 인간이 역사의 공범이 된다는 선언을”
# 1. 예루살렘의 법정에 선 아렌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독일 유대계 출신으로 대학에서 하이데거와 야스퍼스로부터 지도를 받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정치철학자이다. 그녀는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뒤 곧바로 독일을 탈출해 파리로, 다시 1941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녀의 대표작으로는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1958) 그리고 이 책을 꼽는다.
앞서 서독 청년들에게 세 번째 재판(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에 앞서 두 번째 충격을 안겼던 그 예루살렘 법정으로, 이제는 역사가 아니라 한 정치철학자의 눈을 통해 다시 들어가 볼 차례다. 이 책은,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아르헨티나에 은신해 있던 아돌프 아이히만(유럽 각지의 유대인을 절멸수용소로 이송하는 실무를 총괄했던 인물)을 무단으로 체포해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와 특별법정을 설치해17) 1961년 4월 11일부터 1962년 5월 29일까지 진행된 재판(1심은 아이히만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고,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 원심이 확정되었으며, 5월 31일 사형이 집행되었다)을 다루고 있다. 아렌트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요커」로부터 요청을 받아 특파원 자격으로 196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5월 10일까지 직접 참관했다18).
17) 아이히만 재판이 진행되던 시기, 이스라엘은 1956년 제2차 중동전쟁 이후에도 시리아 국경지대의 무력 충돌과 요르단강 수자원을 둘러싼 총격전으로 주변 아랍국가들과 긴장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가 재판관할권 원칙이라는 국제법 관행까지 어겨가며 아이히만을 납치·기소·처형해 주권국가로서의 존재를 과시한 것은, 이미 고조되어 있던 이 지역 긴장에 또 하나의 자극이 되었다. 이러한 긴장은 1964년 아랍연맹 주도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결성과,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으로 이어지며 중동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18) 당시 검찰총장이자 공판검사였던 기드온 하우스너는 홀로코스트를 이스라엘 국민의 집단기억으로 봉합하려는 정부의 정치적 의도를 반영해, 아이히만의 구체적 범죄 입증보다 생존자들의 비극적 증언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재판을 이끌었다. 아렌트가 재판 전 기간을 직접 참관하지 못하고 상당 부분을 공식 재판기록 검토로 대신한 데에는 이러한 사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아렌트는 이 취재 기록을 주간지 「뉴요커」에 5회에 걸쳐 게재를 하였고, 그후 내용을 보완하여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를 미국에서 출간했고, 서독에는 1964년에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출간 즉시 전례 없는 논쟁의 폭풍에 휩싸였다. 하나는, 아렌트가 나치 점령아래 유럽 각지에 설치되었던 유대인 평의회의 일부 지도자들이 이송 명단 작성 등을 통해 나치 당국에 협력했다는 사실을 지적한 대목이다. 이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공동체 내부에서 ‘피해자를 모독한다’는 격렬한 비판을 낳았다. 다른 하나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 자체가 마치 아이히만의 죄를 경감시키려는 시도라고 오해를 받았다. 이로 인해 아렌트는 오랜 동료였던 게르숌 숄렘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과 결별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 2. 아이히만이라는 인물 – 칸트의 왜곡에서 악의 평범성까지
슐링크가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한나라는 인물을 통해,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시·테레자·사비나·프란츠를 통해 각자의 인물을 그려냈다면, 아렌트가 그려낸 인물은 단 한 사람, 법정 방탄유리 부스 안에 앉아 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아이히만은 재판과정에서 “네 행동의 원칙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라는 칸트 철학의 정언명령을 언급하면서 자신은 그에 따라 “나는 내 행동의 원칙을, 공무원으로서 입법자인 히틀러의 의지와 법에 일치시키려 노력했다. 즉, 총통의 명령이 곧 내 행동의 보편법칙이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칸트철학 주장이 정반대로 왜곡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즉, 칸트철학의 핵심은 ‘스스로 생각하라’와 ‘타인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인데, 아이히만은 ‘남(히틀러)이 정해준 대로 따랐’고 ‘타인을 수단으로 취급했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아렌트는 칸트철학의 핵심 중 하나는 모든 인간에게 자기행동을 보편화해도 괜찮은지 스스로에게 묻고 판단해야 하는데, 아이히만은 스스로 물어보고 생각해 보는 과정, 즉 생각 없이 명령에 복종했기에 칸트철학을 정반대로 왜곡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이 지점에서 아렌트의 사고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서양의 문학과 철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악인’은 적어도 ‘악’을 인식하고 있었다. 아렌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나오는 악인을 인용하면서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리처드 3세도 아니었다”고 하였다. 「오셀로」에서 나오는 이아고는 악의 화신이었고, 「맥베스」의 맥베스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지만 극심한 죄책감과 도덕적 갈등을 하는 인물이며, 「리처드 3세」에 나오는 리처드 3세는 “나는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했다”고 하면서 악을 선택하였지만,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가 악에 해당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아렌트는 제1장에서 아이히만을 “아이히만은 중간 정도 체격에 호리호리한 중년으로, 근시에다가 이마가 벗겨지고 치아가 고르지 않았다”고 묘사하였다. 그리고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나는 법을 어긴 적이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유대인을 증오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저 공무원으로서 유대인 수 백만명을 이송하는 행정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람들은 아이히만에게서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악마적 모습과 태도, 생각이 드러나기를 예상했지만, 아이히만이 재판과정에서 보인 현상은 그저 평범한 그 자체였고, 다만 진부한 상투어를 사용하고 생각하기를 멈추고 총통의 명령과 법을 성실하게 따랐다는 점이었다. 이 책이 출간된 이후 베티나 슈탕네트는 2011년 저서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나치 동조자들과 나눈 이른바 ‘자센 인터뷰’에서 법정에서 보인 태도와는 달리 실제로는 반유대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내용을 밝히면서 그가 재판과정에서 보인 모습은 ‘순진한 관료’ 페르소나를 의도적으로 연출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였다.
아렌트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을 딱 한번 사용하였다. 바로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근본적인 결함은 이념적 확신이나 병리적 잔혹성이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능력의 완전한 부재, 즉 사유의 무능이라고 하였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열차에 실어 보내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상상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은 행위 자체가 20세기가 낳은 새로운 악, 즉 관료제적 순응에서 탄생하는 악이라는 개념을 만들게 되었다. 마치 형용모순처럼 들리는 ‘평범한 악’은 20세기 후반에 제노사이드 사건이 벌어질 때 마다 가장 뜨거운 철학적 주제가 되었다.
# 3. 법정에서의 쟁점과 새로운 범죄에 대한 경고
아이히만 재판은 처음부터 순수한 사법 절차가 아니었다19). 아렌트는 이스라엘 정부가 아이히만이 직접 관여하지 않은 행위까지 포함시켜 홀로코스트 전체를 형사재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예루살렘 재판에는 크게 세 가지 법적 쟁점이 남았다고 지적하였다.
19) 이스라엘 초대 총리 벤구리온이 아이히만을 예루살렘 법정에 세운 데에는 복합적인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첫째, 홀로코스트를 이스라엘 전체의 집단기억으로 공식화함으로써 생존자 세대와 이스라엘 태생 세대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건국의 정당성을 강화하려 하였다. 둘째, 나치 범죄를 부각시켜 서독과의 배상금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 하였다. 셋째, 아랍 민족주의 세력의 나치 동조 이력을 부각시켜 주변 아랍 국가들의 단결 명분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아렌트는 이러한 정치적 목적이 재판의 성격 자체를 왜곡시켰다고 비판하였다. 한편 아이히만의 납치 자체는 국제법적으로도 논란이 되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960년 6월 23일 결의 제138호(S/RES/138)를 통해 이스라엘의 아이히만 이송이 아르헨티나의 주권을 침해했다고 선언하고 이스라엘에 “적절한 배상”을 요청하였다(찬성 8, 기권 2, 아르헨티나 불참). 다만 이 결의는 아이히만의 범죄 자체를 용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결의문에 명시하여, 주권 침해 문제와 아이히만의 유죄 여부를 의도적으로 분리하였다.
첫째는 재판관할권 문제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무단으로 납치해 왔는데, 이는 아르헨티나의 주권을 침해하는 국제법 위반이었다. 게다가 아이히만이 범죄를 저지른 당시 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았던 국가였고 피해자들도 이스라엘 국민이 아니었다. 아렌트는 나아가 홀로코스트가 특정 국가의 국민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범죄인 이상, 뉘른베르크 재판처럼 국제군사재판소에서 다뤄야 했다고 보았다.
둘째는 소급처벌 문제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1950년 제정한 ‘나치, 나치 협력자 처벌법’에 근거해 재판을 진행했는데, 이는 다른 국가에서 다른 국가 국민에 대해 이미 종료된 범죄를 소급해서 형사처벌할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 물음을 남겼다.
셋째는 재판 내용상의 문제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항변을 기각하는 논리가 충분치 않았다는 점,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유대인 자치위원회의 나치 협력 방조 행위가 축소·은폐되었다는 점도 함께 지적하였다.
아렌트의 결론은 명확했다. 아이히만은 유죄이고 그에 상응하는 형사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그 재판은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법의 일반원칙에 따라 올바른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렌트가 이 재판을 통해 던진 질문은 아이히만이라는 한 개인의 유무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 사건의 문제점은 바로 아이히만과 같은 사람이 너무 많았고, 그 많은 사람이 도착적이지도 가학적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끔찍할 정도로 또 무서울 만큼 정상적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정상적이라는 점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사실상 인류의 적인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음을 알거나 느낄 수 없게 만드는 상황에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한다.
아렌트는 나치 범죄를 이스라엘 정부가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유대인을 증오해서 죽인 것”으로 규정하게 되면 “유대인을 증오하지 말라”는 결론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즉, 나치가 위험한 것은 “유대인이 열등하므로 멸절되어야 한다”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치가 누가 살고 누가 죽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 즉 선별의 원칙을 채택한 것이다”를 강조하고 있다. 나치는 선별기준으로 인종을 사용해서 유대인, 집시, 장애인 등을 지구상에 불필요한 존재로 분류했다. 나치가 문제였던 것은 ‘인종’을 기준으로 분류한 것인가?
아렌트는 나치 범죄의 본질을 ‘반유대주의’가 아니라 ‘절멸할 인간을 선별 가능하다는 기준을 세운 것’에 있다고 보았다. ‘반유대주의’라는 기준은 언제 어디서든 다른 형태로 반복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녀는 1963년에 이 책 에필로그에서 “나치가 저지른 범죄가 반복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몇몇 이유는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현대의 인구 폭발과 자동화를 통해 노동력 면에서조차도 인구의 많은 부분을 ‘잉여’로 만들어버리는 기술장치들의 발견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섬뜩하다”고 쓰고 있다. AI 자동화로 인해 인간의 노동력이 덜 필요하게 된다면 언제든지 ‘유대인’이라는 선별 기준이 ‘비생산적 인간’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 4. 서독에 남긴 유산과 68세대의 질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독일어로 출간된 1964년은, 서독에서 1963년부터 1965년까지 183일간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이 진행되던 중이었다. 이 재판으로 서독 국민들에게 나치 범죄의 구체적인 실상을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드러냈고, 아렌트의 책은 이 재판이 던진 질문 “우리 주변에 사는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끔직한 범죄에 가담할 수 있었는가”에 철학적 의미를 전달했다. 68 세대는 이 두 사건을 통해 나치의 범죄가 광신적 소수가 벌인 일이 아니라 “그저 시키는 대로 한” 평범한 다수의 무사유에서 비롯되었고, “우리 부모, 우리 교수들 대부분이 바로 그 평범한 가해자 혹은 방조자였다”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이 질문에 스스로 답을 남겼다. “나는 그저 절차를 따랐을 뿐이다”라는 항변이 왜 면책사유가 될 수 없는지, 그리고 관료제라는 거대한 기계 안에서 개인의 도덕적 판단력이 형해화될 때 법은 ‘악의 평범성’을 어떻게 처벌할 수 있는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이 질문은 68혁명 세대가 자신의 부모 세대와 교수 세대를 향해 던진 “당신들은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물음과 정확히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렌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오래 걸렸다. 2002년 7월 1일 설립된 국제형사재판소(ICC) 로마규정 제33조는 “상급자의 명령에 따른 행위라도 그 명령이 명백히 위법한 경우에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명문화하였다20).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한 여성 정치철학자가 참관석에 앉아 던졌던 질문이 국제법으로 편입되기까지 40년이 걸린 셈이다.
20) 국제형사재판소를 설립하려는 시도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1919년)에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국제도덕과 조약의 신성함에 대한 최고의 범죄’로 보아 특별 국제재판소 설치를 규정하면서 시작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뉘른베르크와 도쿄에 임시 국제군사재판소를 설치한 것 외에는 냉전시대가 끝날 때 까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90년 냉전시대가 끝난 직후 다시 유고슬라비아에서 인종청소와 집단학살이 벌어지자 1993년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되었고, 다음해인 1994년에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되었다. 이를 기초로 1998년 로마에서 120개국의 찬성으로 로마규정이 채택되었고 60개국이 비준하여 2002년 7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설립되었다. 당시 미국, 중국, 러시아, 이스라엘은 반대하거나 서명을 철회했다. 지금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5개 국가 중 미국, 중국, 러시아 3개국이 참여를 하지 않고 있고, 안보리 거부권을 행사해서 ICC 회부를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직도 구조적인 취약성을 갖고 있다.
# 5. 텍스트가 말하다21).
21)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알라딘 리커버 특별판)
“허풍은 흔한 악덕인데 반해, 아이히만의 성격에서 더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결함은 타인의 관점에서 어떤 것도 보지 못하는 거의 완전한 무능함이었다” “그의 말을 오래 들을수록, 그의 말의 무능함은 그의 생각의 무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함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더욱 분명해졌다.” (159쪽, 162쪽)
“그들 중 일부는 내가 아는 어떤 장인처럼 진실되고 속 깊은 경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나치당에 입당하는 ‘사소한 형식적 절차’를 취하는 것 대신 자신의 독립적 실존을 무너뜨리고 공장에서 단순노동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몇몇 사람은 여전히 맹세를 진지하게 여겼고, 예를 들어 히틀러의 이름으로 서약하기 보다는 학문적 경력을 포기하는 것을 선택했다” (250쪽)
“이런 폭력적인 죽음의 분위기에서 특히 효과적이었던 것은, 최종 해결책이 후기 단계에서는 총살, 즉 폭력을 통해 실행되지 않고 가스 공장에서 실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가스 공장들은 전쟁 초기에 히틀러가 명령을 내려 러시아 침공 때 까지 독일에서 정신질환자들에게 적용된 ‘안락사 프로그램’과 처음부터 끝까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254쪽)
“독일 국민과 일부 용기 있는 교회 고위 성직자의 항의 때문에 독일 내부에서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가스 살해가 중단되어야 한다고 빈번히 지적되어 왔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유대인에 대한 가스 살해로 전환되었을 때에는 그러한 항의가 나오지 않았다” (259쪽)
“유대인장로회는 아이히만이나 그의 부하를 통해 각 열차를 채우는 데 어느만큼의 유대인이 필요한지 통보받은 후 추방 대상자 명단을 만들어 주었다…숨거나 탈출하려는 소수의 사람은 유대인 특별경찰이 검거했다. 아이히만이 보기에,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고 누구도 협력을 거부하지 않았다. 1943년 베를린의 한 유대인 목격자가 쓴 것처럼, ‘날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장례식을 위해 이 곳을 떠났다’” (269쪽)
“우리는 유대인 관계자들이 살인 도구가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고 있다. 마치 ‘침몰 직전의 배에서 상당한 양의 소중한 화물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배를 안전하게 항구로 몰고 오는데 성공한’ 선장처럼, 또 ‘백 명의 희생자로 천 명을, 천 명의 희생자로 만 명을 구원한’ 구원자처럼 느꼈을 것이다. 진실은 이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273쪽)
“유대인이 살았던 어디에나 인정받는 지도자가 있었고, 그 지도층은 거의 예외 없이 여러 가지 이유로 어떤 방식으로든 나치와 협력했다. 완전한 진실은, 만일 유대인이 정말로 조직적이지 않고 지도자도 없었다면 혼란스러움과 수 많은 불행이 있었겠지만 전체 희생자 수가 450만에서 600만 명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284쪽)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 (4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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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 – 관찰자로서의 실존적 딜레마
“나치 부역자를 단죄하라고 외친 68세대는 정작 부역자를 사랑한 자신을 어떻게 심판해야 할지 몰랐다. 이 책은 그 침묵의 기록이다”
# 1. 68운동의 한 복판에서, 다른 시선으로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1944년생으로 헌법재판관 출신의 법률가이다. 그는 68운동의 근거지였던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바로 그 해에 대학을 졸업했다. 슐링크는 거리에 나가 함께 하는 길 대신 판사와 헌법재판관을 거쳐 법철학교수가 되는 정통 법률가의 길을 걸었다. 슐링크가 1995년에 발표한 「책 읽어주는 남자」는 68혁명의 참여자가 아니라 관찰자로서의 관점에서 이 책을 썼다.
브레히트가 ‘후손들에게’에서 자신의 시가 야만의 시대(나치 집권시절)를 살아 내야 했던 자기 세대의 항변(친절할 수도 선할 수도 없었다)이었다면, 슐링크의 이 책은 그 시대를 겪지 않은 ‘나중에 태어난 자들’이 물려받은 죄와 침묵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 책이 1997년 영어판으로 미국에서 출간되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가 되었고, 1998년에는 독일에서 ‘한스 팔라다 상’을 수상했으며, 1999년에는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에 선정되었다. 또한, 이 책은 2008년 영화 「더 리더」로 상영되어 케이트 윈슬렛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 2. 침묵의 대가 – 낭독에서 법정까지
소설은 1958년 서독의 한 도시에서 시작된다. 15세 소년 미하엘 베르크는 우연히 알게 된 36세의 여성 한나 슈미츠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되던 중, 어느날 한나는 관계를 갖기 전에 미하엘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였다. 미하엘은 관계를 계속하기 위해서 한나에게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체호프의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 실러의 ‘간계와 사랑’, 스탕달의 ‘적과 흑’,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 등을 읽어준다. 두 사람은 함께 근교로 자전거 여행을 갔지만 그 여행 기간 동안 한나는 메뉴판을 읽지 못하고 미하엘이 남긴 쪽지도 읽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한나는 회사로부터 승진 제안을 받은 다음 날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고, 미하엘은 깊은 상실감 속에 성장해 법대생이 된다.
몇 년 뒤, 법대생이 된 미하엘은 나치 전범을 다루는 세미나의 일환으로 한 재판을 방청하게 되고, 그곳에서 피고인석에 앉은 한나를 다시 마주한다. 한나는 전쟁 중 아우슈비츠 인근 수용소의 여성 감시원으로 근무했으며, 이송 도중 폭격으로 화재가 난 교회에 갇힌 유대인 수감자들을 구하지 않고 방치해 사망하게 한 혐의로 기소된 상태였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미하엘은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는다. 한나는 문맹이었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서에 서명했다는 누명(실제로는 다른 감시원이 작성한 보고서)을 스스로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알게 된 미하엘은 고민에 빠진다. 교수와도 얘기해 보고, 아버지를 찾아가 이야기도 해 본다. 그리고 판사도 찾아갔지만 핵심은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미하엘이 법정에서 한나가 문맹이라는 한 마디만 한다면 그녀의 형량을 경감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미하엘은 한나의 선택을 지켜준다. 한나는 문맹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수치심보다 종신형을 선택하였다. 그후 미하엘은 동료와 결혼하였다가 이혼을 한 후 불면의 밤을 견디기 위해 ‘오디세이아’ 책을 낭독하다가 한나를 생각하게 되고 한나에게 책을 낭독하여 녹음테이프를 보내주게 된다. 한나는 미하엘이 보내 준 낭독 녹음테이프를 통해 결국 스스로 글을 깨우치게 되었으나, 가석방을 앞둔 전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 3. 공감과 면책 사이
이 소설이 그려내는 세대 구도는 68혁명의 통상적 서사와는 다르다. 미하엘은 가해자도 아니고, 거리로 나가 “아버지, 나치 시절에 무엇을 하셨나요?”를 외치는 68세대의 전형적 투사도 아니다. 그는 사랑했던 여자의 죄를 뒤늦게 법정에서 알게 되었다. 그는 그녀에 대한 재판에서 진실을 밝혀야 하는지 아니면 그녀의 수치심을 지켜줘야 하는지에 대해 갈등하는 위치이다.
법률가의 관점에서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한나에게 내려진 형량의 아이러니다. 그녀는 실제로 저지른 행위(교회 화재 방치)에 대한 형사책임과, 자신이 서명하지 않은 보고서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 쓴 채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즉, 그녀가 받은 형량은 “그녀가 실제로 한 일”에 대한 정확한 응보가 아니라, “그녀가 숨기고 싶어했던 무능력”이 만들어낸 왜곡된 결과물이다. 이는 형사재판이라는 제도가 피고인의 진실한 자기 진술 능력에 얼마나 크게 의존하는지, 그리고 그 능력이 결여된 피고인 앞에서 정의의 저울이 얼마나 쉽게 기울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소설은 출간 이후 상당히 날카로운 윤리적 비판에 부딪혀 왔다. 한나는 수백 명의 유대인 수감자를 불타는 교회에 방치해 죽게 한 인물이다. 그런데 소설은 그녀의 범죄 자체보다 ‘문맹을 감추려는 개인적 수치심’에 서사의 무게중심을 두며, 독자가 가해자의 내면적 고통에 몰입하도록 유도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를 ‘홀로코스트의 상대화’라고 하는데, 가해자의 문맹이라는 개인적 결함이 그녀의 범죄 보다 서사적으로 더 크게 부각되면서, 정작 불타는 교회 안에 있었던 피해자들의 고통이 상대적으로 주변화되었다는 것이다.
형사재판에서 정상참작 사유를 고려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양형 절차다. 그러나 그 정상참작이 ‘행위에 대한 이해’를 넘어 ‘행위에 대한 면책 내지 공감의 확대’로 이어지는 순간, 정의의 저울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 논쟁은 2008년 영화가 개봉되면서 더 확대되었다. 케이트 윈슬렛은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을 만큼 찬사를 받았지만, 영화는 그녀의 신체 노출 장면과 원작의 논쟁이 뒤섞이며 “반성하지 않는 대량학살범에게 공감하라고 요구하는 영화”라는 비판도 받았다. 결국 소설이든 영화든, 가해자의 내면을 서사화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이 위험이야말로, 문학과 영화가 법정의 언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인간 이해의 영역을 다루면서 동시에 짊어져야 하는 무게라 할 수 있다.
# 4. 텍스트가 말하다22).
22)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김재혁 옮김, 시공사 기준.
“우리 모두는 우리의 부모들에게 수치의 판결을 내렸다. 우리가 그들을 고발한 내용은, 그들이 1945년 이후에도 그들 주변에 있는 범죄자들의 존재를 묵인했다는 것이다” (120쪽)
“우리 2세대들은 유대인 박멸과 관련된 끔찍한 정보들을 실제로 어떻게 대해야 했으며 또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제2세대인 우리들은 경악과 수치감과 죄책감으로 입을 다무는 것,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인가?” (135쪽)
“하지만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한나는 진심에서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달리 행동해야 했는지, 어떻게 달리 행동할 수 있었는지 정말 몰랐다.” (144쪽)
“그녀는 법정에서만 싸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숨기기 위해서 그녀는 늘 싸우고 또 싸워왔다” (171쪽)
“나는 한나의 범죄를 이해하고 싶었고 동시에 그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내가 그녀의 범죄를 이해하려고 할 때 마다 나는 그녀의 범죄에 대해 당연히 내려야 할 합당한 유죄판결을 결코 내리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그러나 나는 한나를 이해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또다시 그녀를 배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나는 이해와 유죄판결, 이 두 가지에 대해 나름대로 입장을 취해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200쪽)
“나의 주변 사람들이 저질렀고 또 그로 인해 비난을 받은 행동들은 한나가 저지른 행동에 비하면 훨씬 덜 나쁜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사실 한나에게 손가락질을 해야했다. 그러나 한나에게 한 손가락질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선택했다”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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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역사의 무거움과 존재의 가벼움
“아렌트의 생각하지 않음이 어떻게 인간을 악의 실행자로 만드는지를 보여줬고, 슐링크는 침묵이 어떻게 도덕적 방조가 되는지를 보여줬다. 쿤데라는 그 두 질문이 교차하는 자리, 프라하의 봄이 짓밟힌 거리에서 더 불편한 것을 묻는다. 옳은 선택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살아남아야 했던 자들에게, 존재는 얼마나 가볍고 또 무거운가?”
# 1. 경계인의 시선
작가 밀란 쿤데라(1929-2023)는 평생 경계인의 삶을 살았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지만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작품이 금서가 되었고,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한 후 체코어로 작품을 쓰다가 1995년경 부터는 프랑스어로 작품을 썼다. 이 책은 1984년에 프랑스에서 출판되자마자 전 세계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우리나라에는 1988년에 소개되었다. 이 책의 프랑스판 제목은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이고 영문판은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이었다(체코어 판은 검열로 출판되지 않았다).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어순에 맞을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을 출판한 민음사는 ‘참을 수 없는’이 오직 ‘가벼움’만 수식하는 것 보다는 ‘존재의 가벼움’을 수식하도록 함으로써 쿤데라의 의도와 철학을 더 잘 상징하게 되었다.
1988년 당시 한국 사회는 격동의 시기였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분열로 인해 패배하였고, 서울 올림픽을 거치면서 청년세대 사이에는 서서히 균열이 발생하면서 소극장 공연, 인디 문화, 록 음악 등 다양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책은 1988년 11월에 출판된 이후 한국에서만 100만부 이상이 판매되었고, 그야말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소설 책을 다 읽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 첫 문장이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으로 시작하고 바로 뒤이어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의 ‘묵직함과 가벼움’이 따라온다. 독자들은 시작부터 난관에 빠지게 된다. 두 번째로는 이 책의 목차를 보면 “1부 가벼움과 무거움 – 2부 영혼과 육체 – 3부 오해된 단어들 – 4부 영혼과 육체 – 5부 가벼움과 무거움 – 6부 대장정 – 7부 카레닌의 미소”로 되어 있어 시간적 순서로 진행되지 않는 소나타 형식 구성과 작가가 철학적으로 개입하기도 한다. 세 번째로는 주요 등장인물들이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또는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전환되는 등 입체적이며 철학적이다. 마지막으로 쿤데라의 핵심 개념인 ‘키치’를 이해해야만 주요 등장인물 네명의 키치와 작가의 의도를 다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독자 마다 각자 다른 소설책을 읽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철학에세이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으며, 빨리 읽는 것 보다는 작가의 의도에 맞추어 대화를 하며 읽어야 하는데, 작가는 그 어떤 결론도 제시하지 않는다.
# 2. 네 명의 각자 다른 삶의 태도
쿤데라는 이 소설에서 네 인물,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와 프란츠를 창조했다. 작가는 4명의 등장인물에게 각각 다른 하나의 철학적 입장을 담아내고 있다.
토마시는 ‘가벼움’의 화신으로 출발한다. 수십 명의 여성과 유지하는 에로틱 우정, 어떤 관계에도 깊이 얽히지 않으려는 원칙, 이것은 단순한 자유가 아니라 니체의 ‘영원회귀 없는 삶’에 대한 철학적 응답이다. 그러나 테레자라는 존재가 균열을 낸다. 취리히에서 테레자를 따라 프라하로 돌아가는 순간, 토마시는 가벼움의 철학을 스스로 배반한다. 이후 의사에서 유리닦이로의 추락, 시골에서의 트럭 운전사 생활, 역설적으로 이 물질적 추락이 그를 처음으로 자유롭게 만든다.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의 이동이 곧 토마시의 서사다. 하지만 삶의 태도가 무거움으로 이동한 후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테레자는 ‘무거움’의 화신이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토마시의 외도에 악몽을 꾸며 스스로를 토마시에게 무거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자책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가둬 놓지만은 않았다. 테레자는 사비나가 토마시의 섹스 파트너인걸 알면서도 그녀의 도움을 받아 잡지사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프라하 광장에서는 소련 탱크 앞에서 카메라를 든 사진가가 되었고, 스위스 취리히에서 망명 생황을 하다가 혼자 프라하로 돌아가는 결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사비나는 가장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인물이다. 그녀의 핵심 가치는 ‘배신’, 즉 관계의 지속성 단절이다. 아버지, 체제, 프란츠, 유럽, 미국 등 그녀의 연쇄적 배신은 어떤 무거움에도 포획되지 않으려는 자유의 추구였다. 그러나 결국 사비나도 마지막 미국에서는 배신할 것이 더 이상 없어진 순간에 공허함과 마주치게 된다.
프란츠는 ‘대장정’의 서사 속에 살면서도 사비나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역사, 진보, 연대 라는 거대 서사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사비나가 그를 ‘배신’하고 떠난 후, 그는 제자였던 학생과 동거를 하면서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국경 없는 의사회가 1980년 2월 베트남에 점령당한데다 기근으로 황폐화된 캄보디아에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캄보디아 생존을 위한 행진’23)을 주최하자 사비나의 고국인 체코슬로바키아의 불의와 캄보디아의 불의를 동일시 여기고 이 불의에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국경 의료 시위에 참여한다. 결국 그는 국경 시위에서 돌아온 날 방콕의 어느 거리에서 강도에게 습격 당해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그가 죽음에 가까워지자 그의 옆자리를 지킨 것은 별거 중인 그의 아내였다. 사람들은 그의 장례식에서 그와 그의 아내가 별거 중이고 관계가 사실상 끝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동거녀 대신 그의 아내를 주인공으로 대우했다. 쿤데라는 “부인에게는 남편의 장례식이 결국 그녀의 진정한 결혼식이었다. 자기 삶의 끝매듭, 모든 고통의 보상”이라고 적었다.
23) 1980년 2월 ‘캄보디아 생존을 위한 행진’은 국제구조위원회와 프랑스 의료단체, 국경없는 의사회가 주도했으며, 조안 바에즈·베이어드 러스틴·엘리 비젤·리브 울만 등 약 100명이 참가했다. 그러나 쿤데라는 소설 속에서 참가자에 기자 400명을 더해, 이 행진을 실질적 구호가 아니라 자기 확인을 위한 퍼포먼스로 묘사했다. 이는 프란츠를 자신의 핵심 개념인 ‘키치’—선의의 대의조차 개인을 소모시키는 정치적 자기만족—에 포함시키기 위한 의도적 왜곡으로, 서구 지식인의 68혁명 열정이 프라하 시민들의 실제 현실과 동떨어진 키치였음을 보여주려는 쿤데라 특유의 경계인적 시각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소설 속 네 인물 중 누구도 완전한 삶을 살지 못했다. 쿤데라는 가벼움도, 무거움도, 배신도, 대장정도 그 어떤 실존 방식도 완전한 해답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 3. 정답으로 가는 문이 없다 – 읽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소설
쿤데라는 독자가 어떤 문으로 들어오든 반드시 다른 문 앞에서 멈추도록 설계해 놓았다. 그것이 이 소설이 40년이 지나도 계속 읽히는 이유이며, 동시에 단 한 번의 독서로는 결코 다 읽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무거움의 관점으로 읽는 독자는 테레자에게서 자신을 본다. 관계에 진지하게 임하는 것, 뿌리를 갖는 것,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약함이 아니라 정직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을. 그러나 이 관점은 사비나 앞에서 흔들린다.
가벼움의 관점으로 읽는 독자는 토마시에게 공감한다. 토마시는 단 한 번밖에 없는 삶에서 집착은 또 하나의 자기기만이라고. 그러나 이 관점 역시 사비나의 결말 앞에서 흔들린다. 배신할 것이 없어진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공허였다.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의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독자는 토마시가 가벼움에서 출발하여 무거움에 이르는 과정에 집중한다. 토마시는 가벼움을 살다 무거움을 발견했고, 그 이동 자체가 인간이 어떻게 실존 방식을 바꾸는가라는 더 깊은 질문으로 진입한다.
전체주의 비판의 관점으로 읽는 독자는 이 소설을 전체주의 체제가 개인을 파괴하는 방식의 정밀한 기록으로 읽는다. 쿤데라는 소련식 공산주의 뿐만 아니라 서유럽의 자본주의도 거대 서사가 개인을 소멸시키는 구조라는 관점에서 비판한다. 쿤데라는 프란츠의 대장정도 동일한 구조적 폭력이며 하나의 거대서사라고 본다.
페미니즘의 관점은 토마시의 관계 체계가 남성의 자유를 위해 여성에게 불균등한 고통을 부과하는 구조임을 본다. 그러나 쿤데라는 테레자를 피해자로만, 사비나를 해방자로만 그리지 않는다. 두 여성 모두 자신의 방식으로 주체이며, 자신의 방식으로 고통받는다.
결국 이 소설은 어떤 관점으로 읽어도 그 관점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무거움을 선택한 독자에게는 가벼움의 유혹을, 가벼움을 선택한 독자에게는 공허를, 역사를 중심에 둔 독자에게는 개인의 실존을 돌려보낸다. 쿤데라가 남긴 것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 자체다. 정작 이 소설의 유일한 영상화(1988년, 필립 카우프만 감독, 한국 개봉명 「프라하의 봄」)를 두고 쿤데라 자신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읽는 사람마다 다른 소설로 남도록 설계된 이 작품을, 영화는 하나의 결론으로 향하는 서사 구조를 취하고 있어 결국 하나의 ‘키치’로 봉합해버렸다고 느꼈던 것은 아닐까? 이후 그는 자신의 작품이 영상·연극으로 각색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였다고 한다.
# 4. 카레닌의 미소가 마지막에 오는 이유
소설의 마지막 부 제목이 인간이 아닌 개 ‘카레닌’의 이름을 달고 있다. 카레닌이라는 이름은 안나 카레니나에서 왔다. 톨스토이 소설에서 카레닌은 사랑받지 못한 남편의 이름이다. 쿤데라는 이 이름을 개에게 줌으로써 처음부터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사랑과 동물의 사랑 중 어느 것이 더 순수한가?
카레닌은 무조건적 사랑의 상징이다. 상호성을 요구하지 않고, 배신하지 않으며, 질투하지 않고, 거래하지 않는 사랑. 토마시와 테레자가 서로에게 요구한 것들을 카레닌은 아무 요구 없이 그저 준다. 소설 전체에서 토마시-테레자, 사비나-프란츠, 사비나-토마시의 관계는 모두 갈등, 오해, 배신,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모든 인간 관계의 복잡성 다음에 카레닌을 놓음으로써 쿤데라는 묻는다. 이것이 사랑인가, 저것이 사랑인가?
카레닌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방식으로 두 사람을 맞이한다. 인간 관계에서 이 반복은 지루함이 되지만, 카레닌에게는 순수한 충실이다. 쿤데라는 이 반복 속의 충실이 인간이 추구하지만 결코 완전히 달성할 수 없는 사랑의 이상임을 암시한다. 카레닌은 암으로 죽는다. 테레자는 그 임종을 돌보며 처음으로 사랑이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임을 깨닫는다. 테레자는 항상 토마시에게 무언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카레닌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카레닌의 죽음 앞에서 테레자는 처음으로 완전히 줄 수 있는 위치에 선다. 이것이 테레자를 바꾸고, 토마시와의 조용한 화해로 이어진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완전한 사랑을 나누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러나 동물을 향한 사랑 속에서는 완전한 사랑을 잠시라도 경험할 수 있었다.
# 5. 역사에 짓밟힌 개인은 침묵을 선택했다
1968년 8월 소련 탱크가 프라하의 거리를 점령했을 때, 테레자는 카메라를 들었다. 그 사진들은 나중에 몰수되었다. 역사는 개인의 기록조차 지운다. 그러나 쿤데라가 이 소설에서 묻는 것은 역사의 폭력만이 아니다. 그는 그 폭력 앞에서 개인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더 정확하게는 어떻게 침묵하는가를 묻는다.
토마시의 경우가 가장 전형적이다. 그는 소련 침공을 비판하는 에세이를 발표했다가 의사직을 박탈당한다. 비밀경찰은 회유하고, 동료들은 기회주의적으로 침묵한다. 토마시 앞에 놓인 선택은 단순하다. 철회하고 직업을 지키거나, 거부하고 추락하거나. 그는 거부를 선택하지만, 그 거부조차 영웅적 행동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달리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쿤데라는 그 차이를 놓치지 않는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와의 연결이 열린다.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에서 발견했다. 악은 괴물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인간에게서 온다.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직업이라고 믿은 아이히만처럼, 토마시의 동료들은 체제의 요구에 생각을 멈추고 서명했다. 이것이 공산주의 체제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 이 소설의 보편성이다.
프란츠는 다른 방향의 침묵을 보여준다. 서방의 지식인인 그는 체제의 폭력에 공모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한다. 캄보디아 국경 의료 시위에 참가하고, 연대를 외친다. 그러나 쿤데라는 이것도 하나의 침묵으로 읽는다. 거대 서사에 자신을 맡기는 순간, 개인은 생각을 멈춘다. 선의의 침묵이 악의의 침묵보다 덜 위험하지 않다고.
역사와 개인의 관계에서 이 소설이 남기는 가장 무거운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역사 앞에서 어떤 방식으로 생각을 멈추는가? 토마시의 동료들처럼 체제의 압력 앞에서인가, 프란츠처럼 아름다운 서사의 감동 앞에서인가? 아니면 또 다른 방식으로인가? 쿤데라는 이 질문을 1968년 프라하에 묶어두지 않는다. 역사가 개인을 짓밟는 방식은 시대마다 다르지만, 개인이 침묵을 선택하는 방식은 놀랍도록 유사하다. 그리고 그 유사성이 이 소설을 4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형으로 만든다.
쿤데라는 냉소적이다. 거대한 역사의 무게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혁명적 저항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좁은 선택지 안에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혁명적 저항도, 최소한의 저항적 실천도 키치라고 본다. 아마도 프랑스·서독·미국의 68혁명이 기존 질서를 바꾸자는 적극적인 시도였던 반면에, 프라하의 봄은 절박하게 최소한의 요구를 소극적으로 지키기 위한 시도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 않을까? 쿤데라는 파리의 ‘상상력’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곳에서, 존재 그 자체가 최후의 저항이 되어야 했던 그 지점에서 가장 어두운 완성형에 도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6. 텍스트가 말하다24).
24)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옮김, 민음사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값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152쪽)
“범죄적 정치 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이 만든 것이다” (291쪽)
“예전에 동료들이 그가 비겁하다고 생각하고 그를 경멸했을 때, 그들은 모두 그에게 웃어 보였다. 그를 더 이상 경멸할 수 없고 심지어 존경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 된 지금, 그들은 토마시를 피하는 것이다” (380쪽)
“키치는 백발백중 감동의 눈물 두 방울을 흐르게 한다. 첫 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 아이, 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두 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를 보고 모든 인류와 더불어 감동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키치가 키치다워지는 것은 오로지 이 두 번째 눈물에 의해서다” (410쪽)
“어제는 미국의 베트남 점령에 반대하며, 오늘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에 반대하며, 어제는 이스라엘을 위해, 오늘은 팔레스타인을 위해, 어제는 쿠바를 위해, 내일은 쿠바에 반대하며, 항상 미국에 대항하며, 매번 학살에 반대하며, 또한 매번 다른 학살을 지지하면서 유럽은 행진을 계속했다” (439쪽)
“부인에게는 남편의 장례식이 결국 그녀의 진정한 결혼식이었다. 자기 삶의 끝매듭, 모든 고통의 보상” (457쪽)
“토마시가 늙어 보였다. 머리카락에 회색이 감돌았고 어색하게 일하는 그 서툰 모습이란 트럭운전사가 된 의사의 어색함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젊지 않은 한 남자의 서투름이었다” (509쪽)
Ⅲ. 감독의 시선 — 카메라가 포착한 시대의 얼굴
문학이 개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역사와 대결했다면, 영화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시대의 공기 그 자체를 영상으로 표현했다. 아렌트가 법정의 방청석에서, 슐링크가 법률가의 서재에서, 쿤데라가 망명자의 책상에서 각기 다른 거리를 두고 1968년을 응시했다면, 세 편의 영화는 서독의 법정과 지하실, 미국의 배심원석과 시위 대열, 프랑스의 밀실과 거리에서 각기 다른 카메라의 눈으로 그 해의 공기를 포착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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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더 마인호프」(2008) – 이상주의가 낳은 괴물

# 1. 서독 68혁명의 가장 어두운 유산
울리 에델 감독의 「바더 마인호프」는 서독 68혁명이 남긴 가장 어두운 유산을 정면으로 해부한다. 이 영화는 혁명의 낭만이나 예술적 변주가 아니라, 혁명의 실패가 잉태한 가장 참혹한 사생아, 즉 ‘적군파’의 테러리즘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루디 두치케 암살 미수 사건 이후 “말만 하는 시대는 끝났다”며 무장 투쟁을 선언한 안드레아스 바더와 언론인 출신의 이론가 울리케 마인호프의 행적을 쫓는 이 영화는, 나치 과거사 청산의 실패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어떻게 또 다른 폭력의 정당화로 전이되는지를 서늘하게 기록하였다. 이 영화는 2008년 개봉 당시 독일 영화사상 최대 제작비로 화제를 모았고, 2009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으나 본상 수상에는 실패했다.
# 2. 정당한 분노에서 폭력의 재생산으로
에델 감독은 이 인물들을 영웅으로도, 단순한 광신자로도 그리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이들이 처음에는 베트남전 반대와 파시즘 잔재 청산이라는 정당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으나, 국가 폭력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점차 자기 논리 속에 갇힌 폭력의 재생산으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냉정한 거리를 두고 추적한다.
# 3. 슐링크의 질문이 뒤집힌 자리 – 사랑에서 폭력으로
슐링크는 「책을 읽어주는 남자」에서 다음 세대에게 “가해자를 사랑하게 된 자는 그 죄의 공범인가”라고 묻는다. 미하엘은 한나를 사랑함으로써 그 죄의 무게를 나눠 짊어져야 했다. 바더와 마인호프의 세대는 같은 질문 앞에서 정반대의 답을 택한다. 그들 역시 부모 세대가 나치에 부역하고 침묵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배신감을 느낀 자녀들이었으나, 그 발견이 낳은 것은 사랑도 침묵도 아닌 폭력이었다. 가해자를 사랑함으로써 죄의 공범이 된 미하엘과, 가해자를 증오함으로써 스스로 새로운 가해자가 된 바더 세대는 같은 세대론적 구조에서 뻗어 나온 두 개의 상반된 가지다. 슐링크가 던진 질문(다음 세대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은 이렇게 한 세대 뒤, 사랑이 아닌 증오의 형태로 나타났다.
# 4. 「독일 자매」(1981) – 또 다른 가족의 시선

마르가레테 폰 트로타의 「독일 자매」는 적군파 지도부의 시선이 아니라, 구드룬 엔슬린을 모델로 한 동생을 지켜보아야 했던 언니의 시선에서 같은 시대를 재구성한다. 혁명가 본인이 아니라 그 곁에서 침묵을 강요당한 여성 가족의 자리에서 폭력의 유산을 되묻는 이 영화는, 뉴 저먼 시네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바더 마인호프 콤플렉스가 지도부의 궤적을 서사시적 스케일로 그렸다면, 독일 자매는 그 폭력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삶에 남긴 균열을 훨씬 조용한 목소리로 증언한다. 같은 서독, 같은 적군파를 다루면서도 하나는 역사의 무대 위에서, 다른 하나는 그 무대 뒤편 거실에서 카메라를 든 셈이다. 이 작품은 1981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이 영화를 보기가 매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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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2020) – 침묵을 강요당한 법정

# 1. 여덟 명의 피고인, 하나의 법정
애런 소킨이 각본과 연출을 한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은 1968년 8월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벌어진 반전 시위의 주동자들이, 이듬해 “폭동을 선동할 목적으로 주 경계를 넘나든 공모” 혐의로 연방 법정에 회부된 실화 사건을 다룬다. 애비 호프먼과 제리 루빈(급진 반문화 진영), 톰 헤이든(온건 학생운동 진영), 그리고 블랙팬서당 의장 바비 실에 이르기까지, 이념적으로 서로 겹치지 않는 여덟 명의 피고인이 하나의 법정에 강제로 묶이면서 재판 자체가 68혁명이 지녔던 내적 균열, 평화주의와 급진주의, 인종 문제와 반전 운동을 고스란히 재현하였다.
# 2. 재갈 물린 법정 – 지워진 여덟 번째 이름
줄리어스 호프먼 판사가 자신의 법정 질서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바비 실을 의자에 결박하고 재갈을 물린 채 재판을 진행시킨 실제 사건을 정면으로 재현하였다. 하지만 실은 애초에 이 시위에 참여 대상이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 참석이 불가능해진 흑표당 지도자 엘드리지 클리버를 대신해 급하게 투입된 인물이었으나, 검찰이 그의 과거 급진적 발언을 다른 일곱 명의 공모 혐의를 입증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그를 공동 피고인으로 묶었던 것이다. 사흘간 결박과 재갈이 지속된 끝에, 판사는 결국 실에 대해서만 심리무효를 선언하며 그의 사건을 나머지 일곱 명과 분리했다. 이렇게 ‘시카고 8’이 ‘시카고 7’이 되었다.
예루살렘에서의 아이히만 재판이 관료제적 절차의 외피 아래 실질적 정의를 놓쳤다면, 시카고 법정은 그 절차 자체가 한 흑인 피고인의 신체를 결박하고 입을 틀어 막아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어 재판의 형식적인 절차도 준수하지 않았다. 결국 ‘7인’이라는 숫자는 삭제의 기록이고, 미국 사법사에서 가장 악명 높고 논쟁적인 재판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사건의 항소심은 1심 판사의 편파적 소송지휘 등을 이유로 유죄 판결을 파기하였고, 이후 검찰은 재기소를 하지 않았다.
# 3. 가장 대중적인 언어로 되묻는 질문
소킨은 법정극이라는 익숙한 장르 형식으로 절차적 합법성과 실질적 정의 사이의 간극에 대해 대중적인 언어로 되묻고 있다. 이 작품은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해 6개 부문 후보에 올랐으나 본상 수상에는 실패했다. 다만, 골든글로브 각본상과 미국배우조합상(SAG) 앙상블 캐스트상을 수상했으며, 사샤 배런 코언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 4. 「시카고 10」(2007) – 같은 재판, 두 개의 시선

브렛 모건 감독의 「시카고 10」은 실제 법정 속기록을 로토스코프 애니메이션으로 재연하고, 여기에 시위 현장의 아카이브 영상을 뒤섞어 만든 독특한 형식의 다큐멘터리다. 애비 호프먼(행크 아자리아), 바비 실(제프리 라이트), 재판을 진행한 줄리어스 호프먼 판사(로이 셰이더) 등 실존 인물의 목소리를 유명 배우들이 연기하되, 영상은 극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의 형태로 남겨두었다.
모건 감독은 이 작품이 “1968년이 아니라 2007~2008년에 관한 영화”라고 밝힌 바 있다. 이라크 전쟁 시기의 반전 정서를 겨냥해 라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등 동시대 뮤지션의 음악을 삽입한 선택은, 68혁명을 소재로 한 영화가 그 자체로 언제나 “지금, 여기”를 향한 발언이라는 점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소킨의 영화가 법정극의 문법으로 정의를 되묻는다면, 모건의 영화는 형식의 파격 자체로 “역사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작품은 2007년 선댄스 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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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가들」(2003) – 상상력의 무한한 확장

# 1. 아파트라는 해방구
이탈리아의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은 68혁명 당시 파리 거리를 가득 메웠던 청춘들의 뜨거운 열기와 문화적 해방감을 가장 매혹적이고 감각적인 영상미로 복원해 낸 작품이다. 영화는 1968년 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앞의 격렬한 랑글루아 구명 시위 현장에서 미국인 유학생 매튜(마이클 피트)가 프랑스의 자유분방한 쌍둥이 남매 테오(루이 가렐)와 이사벨(에바 그린)을 만난다. 부모가 휴가를 떠나 비어 있는 파리의 고풍스러운 아파트에서, 이 세 청년은 외부 세계의 법과 도덕, 관습이 완전히 차단된 자신들만의 은밀한 문화적·성적 해방구에 매몰된다.
# 2. 창문 안과 밖 — 몽상과 정치의 두 공간
그들에게 아파트는 기성사회의 규범이 통하지 않는 ‘상상력의 무한한 공간’이었다. 반면, 창문 너머 거리는 최루탄 연기와 보도블록, 붉은 깃발이 넘실대는 ‘정치적 격동의 공간’이다. 3명의 남녀 배우 모두 전라 연기와 성기 노출을 하는 걸로 유명하다. 감독 베르톨루치는 벗은 몸 자체를 외설로 여기지 않는다고 밝히며, 오히려 몸의 일부를 가릴 때 그 은폐 행위 자체가 도발적이고 외설적이라고 하였다. 감독은 영화 속 전면 노출, 자위, 정사 장면을 통해 이 청년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1960년대의 성 해방을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아파트 밖 거리에서 청년들이 국가의 권위와 도덕적 검열에 맞서 싸우는 동안, 아파트 안의 세 청년은 신체와 성에 대한 검열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같은 싸움을 사적인 방식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하였다. 프랑스 68혁명이 정치를 바꾸는데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부엌과 침실을 바꾸는 데는 성공했다는 평가와 연결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침실의 승리는 7년 뒤 시몬 베이유의 낙태죄 폐지와 가족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 3. 몽상에 침입하는 역사
영화의 후반부, 아파트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세 사람의 폐쇄적 몽상은 마침내 파국에 이른다. 이사벨은 가스관을 열어 셋 모두를 동반 자살로 이끌려 하였으나, 시위대가 던진 돌멩이가 유리창을 깨고 날아들며 셋을 죽음의 문턱에서 깨운다. 세 청년은 깨진 창문 밖으로 뛰어나와 시위대의 대열에 합류한다. 역사는 이렇게 개인의 몽상에 침입하는데, 그 침입으로 인해 세 청년은 몽상에서 벗어나 그 뜨거웠던 거리로 돌아오게 된다.
# 4. 엔딩 크레딧의 피아프 –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시위대와 잔해, 불길로 뒤덮인 파리의 새벽 거리를 인물 하나 없이 텅 빈 채로 비춘다. 그리고 그 위로 엔딩 크레딧이 오르는 순간,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는 영화 초반을 열었던 지미 헨드릭스의 〈Third Stone from the Sun〉으로 다시 페이드되며 마무리되는데, 이 두 곡의 교차 배치 자체가 감독의 의도였다.
피아프의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선언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맥락과 무관한 샹송이지만, 아파트에 스스로를 유폐시켰던 세 청년이 결국 거리로 뛰쳐나가기로 한 그 선택(몽상에서 행동으로의 이행)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베르톨루치는 이 곡을 통해, 관객이 방금 목격한 청춘들의 탐미적 일탈과 정치적 각성 모두를 ‘후회 없음’이라는 하나의 태도로 봉합하며 영화를 마친다.
이 작품은 2003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공개되었으나 그해 황금사자상은 안드레이 즈뱌긴체프 감독의 「리턴」에 돌아갔다. 이듬해 고야상 최우수 유럽영화상, 유러피언 필름 어워즈 감독상·여우주연상(관객상 부문), 이탈리아 나스트로 다르젠토 감독상 등 유럽 각지의 주요 시상식에 두루 이름을 올렸지만, 본상 수상에는 끝내 이르지 못했다.
# 5. 「평범한 연인들」(2005) – 혁명 이후의 시선

실제로 1968년 5월의 파리 거리에서 카메라를 들었던 필립 가렐 감독의 「평범한 연인들」은 몽상가들이 조명한 혁명의 화려한 불꽃 곁에서, 그 불꽃이 꺼진 뒤의 풍경을 비춘다. 바리케이드가 걷힌 자리에 남은 참혹한 잿더미와 정신적 환멸을 흑백의 거친 입자로 담아낸 이 영화는, 연대할 광장을 잃어버린 청춘들이 아편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애상적인 분위기를 그린다. 이 영화는 2005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은사자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세자르상 유망 남자배우상(루이 가렐)을 받았다.
흥미롭게도 이와 같은 시선은 지구 반대편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에서 그린 풍경, 즉 정치의 열기로부터 한 발 비켜선 채 상실과 애도 속을 부유하는 청춘들의 초상과 비슷하다. 정치적 격동이 걷힌 자리에 남는 것은 대의가 아니라 상실감 그 자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국경을 넘어 같은 정서를 공유한다.
# 6. 「5월 이후」(2012) – 청춘의 새로운 길

한편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자전적 영화 「5월 이후」는 드골의 재집권으로 끝난 환멸의 시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동료들이 마오주의 무장 투쟁으로 경도되거나 공장으로 투신할 때, 주인공 길레스는 미술과 영화라는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통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길을 택한다. 제도적 정치 투쟁은 끝났을지언정, 혁명의 부스러기가 한 개인의 삶과 예술적 실천으로 스며들어 끝내 살아남는다는 이 담담한 서사는, 몽상가들의 열기와 평범한 연인들의 환멸 사이에서 새로운 길, 즉 느리지만 삶의 방식을 바꾸는 혁명의 길을 제시한다. 이 영화는 2012년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각본상(골든 오셀라)을 수상했다.
Ⅳ. 68혁명의 유산 – 물려받은 자유, 그러나 상속되는 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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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시선 – 정치와 문화의 교차로
68혁명을 정치의 관점으로만 보면 그 어떤 국가에서도 정권을 무너뜨리지 못한 미완의 혁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문화와 법제도의 관점에서 보면, 68혁명은 인류가 이룩한 그 어떤 정치혁명보다도 깊고 항구적인 흔적을 우리의 몸과 삶, 그리고 법 속에 새겨 넣은 사건이었다. 하나의 혁명이 정치적으로는 패배하면서 동시에 문명사적으로는 승리할 수 있다는 이 역설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68혁명의 진짜 의미가 드러난다. 그리고 이 역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문명사적 승리를 이끈 바로 그 세대가, 반세기 뒤에는 자신이 무너뜨리려 했던 권위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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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실패의 함의 – 11개국의 선거, 그리고 냉전의 역설
앞서 살펴본 프랑스·서독·미국의 선거 결과가 보여주듯, 68혁명에 참여한 세대는 그 직후 선거에서 대부분 패배하였다. 시야를 11개국 전체로 넓혀도 이 패턴은 반복된다. 일본·이탈리아·멕시코에서도 정권은 바뀌지 않았고, 파키스탄에서만 유일하게 정치권력이 교체되었지만 이마저도 결국 군부가 승복을 거부하면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귀결되었다(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폴란드·브라질에서는 애초에 선거 자체가 없었다). 기득권 세대에 대한 저항이었으나, 정작 그 저항이 표의 힘으로 기득권 세대를 넘어선 나라는 거의 없었던 셈이다.
이 정치적 패배는 냉전 구도 전체에서 보면 더 역설적이다.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은 정치적으로 가장 참담한 대가를 치렀다. 알렉산드르 둡체크가 이끌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1968년 8월 20일에서 21일 사이, 소련을 위시한 바르샤바조약기구 5개국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넘으면서 무력으로 압살되었다. 소련은 이 침공을 정당화하며 ’사회주의 진영 내 어느 한 국가의 이탈은 진영 전체의 공동 이익을 침해하므로 무력 개입이 정당하다’는 이른바 브레즈네프 독트린(제한주권론)을 공식화했고, 그 결과 프라하의 봄에 동조했던 수십만 지식인과 예술가를 대학과 공직에서 축출했다. 서방 진영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신좌파에 대한 연방수사국의 감시·파괴 공작(코인텔프로)이 강화되었고, 서독에서도 적군파의 무장투쟁이 ’독일의 가을’(1977)이라는 국가 비상사태급 안보 위기로 비화하며 공안 통치의 명분을 제공했다. 즉, 68혁명은 단기적으로는 동서 양 진영 모두에서 냉전 체제를 오히려 더 공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얼음은 두꺼워질수록 더 크게 갈라진다. 혁명은 때로 자신이 파괴하려던 체제를 단기적으로 더 견고하게 만든 뒤에야, 비로소 그 체제의 붕괴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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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침실로 – 법전 속에 새겨진 승리들
정치권력 교체에는 실패했지만, 68혁명이 일상의 규범과 법제도에 남긴 흔적은 그 어떤 혁명보다 광범위하고 지속적이었다. 이는 68혁명이 애초에 겨냥한 것이 국가 기구의 장악이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를 바꾸는 일이었음을 떠올리면 오히려 당연하다. 서유럽 전역에서 대학의 의사결정 구조에 학생 대표가 참여하는 공동결정 원리가 법제화되었고, 가족법 영역에서는 이혼의 자유화와 부부재산 공동관리 원칙 등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확립되었다. 서독은 1969년 형법 175조를 개정해 성인 간 동성애를 처벌 대상에서 제외했다. 무엇보다 68혁명은 ’무엇이 정치적인가’ 라는 질문 자체를 재정의했다. 계급 모순 중심의 마르크스주의적 틀은 성별·인종·성적 지향·생태라는 다층적 억압 구조로 확장되었고, 그 결과 정치적으로는 정통 좌파라고 불리는 소련식 공산주의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해진 ’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은 결국 1968년의 거리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 승리는 어디서나 같은 얼굴로 오지 않았다. 일본은 1969년 야스다 강당 진압과 1971~72년 연합적군의 내부 숙청이라는 자기파괴를 겪은 뒤, 정치적 급진화 대신 ‘마이홈주의’와 소비사회로의 철저한 탈정치화를 선택했다. 미국의 신좌파는 정체성 논란으로 파편화되었고, ’침묵하는 다수’ 담론을 앞세운 보수 반동 정치화로 인해 1980년에는 레이건 보수 정치로 이어지게 되었다. 앞서(Ⅰ장 6절) 살펴본 8개국의 궤적을 하나의 틀로 묶어보면, 냉전체제 하 주변국의 68혁명은 결국 개혁(이탈리아의 노동자헌장 제정), 숙청(폴란드의 반시온주의 캠페인), 정권교체(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퇴진), 강경화(브라질의 제도법 제5호)라는 네 갈래의 전혀 다른 결말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네 갈래 모두를 관통하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68혁명은 그 정치적 실패의 잔해 위에서 결국 사람들의 신체와 언어, 일상을 지배하던 권위주의를 해체하는 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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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케이드에서 이사회로 – 68세대와 86세대의 평행이론
그러나 바로 이 승리를 이끈 세대에게서, 역사는 또 하나의 잔인한 아이러니를 준비하고 있었다. 청년 시절 거리에서 부르주아의 질서를 저주하고 기성사회의 모든 제도적 권위를 파괴하려 했던 68세대의 주역들은, 세월이 흘러 역설적이게도 정계·재계·언론계·학계의 최고위층을 독점하는 부르주아 엘리트 집단으로 변모했다. 68혁명의 대표적인 아이콘이었던 다니엘 콘벤디트는 훗날 녹색당의 거물 정치인이 되어 유럽의회의 중심에서 활약했고, 오데옹 극장을 점거했던 청년들 중 상당수는 훗날 파리의 로펌과 은행, 신문사의 편집국을 채웠다.
이 궤적은 결코 프랑스에서만 일어난 것 아니다. 한국의 86세대 역시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 이 때문에 한국의 Z세대 역시 86세대를 향해 ‘부동산과 인맥을 통해 불평등과 특권을 대물림하는 위선적 집단’이라고 프랑스와 형태는 다르지만 방향은 같은 청구서를 던지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최근 ‘니콜라가 낸다’는 온라인 캠페인처럼, 베이비부머 세대가 풍요와 안정된 고용, 후한 연금을 누리는 동안 그 부담을 다음 세대의 빚으로 떠넘겼다는 비판이 공공연히 제기되고 있다.
이 배신의 서사에는 개인의 도덕적 타락으로 환원할 수 없는 구조적 메커니즘이 자리하고 있다. 68세대는 청년 시절 고도성장기의 관성 덕분에 특별한 스펙 없이도 원하는 직장을 골라 들어갔으며, 이후 자신들이 정치·경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자 강력한 노동법과 두터운 복지 제도를 확립해 자신들의 고용 안정성과 은퇴 후의 넉넉한 연금을 완벽하게 보장받았다. 문제는 이 제도가 설계된 시점의 인구구조와 경제성장률이 이후 세대에게는 반복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현재의 젊은 세대는 68세대가 공고하게 구축해 놓은 경직된 노동 시장의 진입 장벽 밖에서 만성적인 주거 빈곤과 비정규직의 늪에 빠져 신음하고 있다. 사회를 해방하려던 혁명가들이 결국 자신들이 그토록 부수고자 했던 성벽의 가장 완고한 주인이 되었다는 비판은, 세대 간 부의 이전 구조라는 냉정한 경제학의 언어로도 정확히 설명된다.
다만 이 기득권화가 늘 같은 얼굴을 하지는 않았다. 68세대의 상당수는 오히려 시장을 풀고 규제를 걷어내는 쪽으로 돌아서서, ‘큰 정부에 맞선다’는 68혁명의 말을 신자유주의의 언어로 바꿔 썼다. 한국의 86세대도 다르지 않다. 학생운동을 이끌던 이들 상당수가 보수 정당과 대기업의 요직으로 들어갔고, 이는 ‘민주화 세력 대 기득권 세력’이라는 단순한 구도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세대는 결코 하나의 색깔로 칠해지지 않으며, ‘기득권이 된 혁명세대’라는 말조차 그 안의 수많은 전향과 배신, 그리고 끝까지 신념을 지킨 소수를 뭉뚱그리는 위험을 안고 있다.
프랑스의 68혁명은 단기적 정권 교체에는 실패했으나 가족법 개정과 성 평등, 가부장제 해체라는 ‘문화 혁명’을 수행해 냈다. 반면 한국의 86세대는 대통령 직선제 쟁취라는 ‘정치 체제의 민주화’에는 성공했지만 일상생활 내부의 권위주의 타파와 다양성의 가치 정립이라는 문화적 민주화를 완수하는 데는 사실상 실패했다. 이로 인해 86세대는 사회의 주류가 되었음에도 미시적 일상의 민주주의 영역에서는 경직된 태도를 노출하는 구조적 한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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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의 이념적 시계열과 Z세대의 저항
68세대의 자녀 세대인 X세대는 1973년 오일쇼크 이후 고성장 엔진이 멈춰 선 침체의 시대에 자라나며, 부모가 광장에서 외치던 거창한 혁명 이론에 극도로 냉소적인 태도로 개인의 취향과 개성적 소비에 몰두했다. 그 뒤를 이은 밀레니얼 세대는 청년 실업률과 단기 계약직 고용 불안정성을 처음으로 일상화하여 경험한 ‘불안정 노동’의 세대가 되었다.
우리는 68세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갈라진 오늘의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여러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흐름은, 같은 세대 안에서도 여성 청년층은 기후·젠더·소수자 의제를 중심으로 한층 진보적인 방향으로 이동하는 반면, 남성 청년층의 상당수는 경제적 불안과 상대적 박탈감을 배경으로 보수적 포퓰리즘에 이끌리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68세대가 기성세대라는 분명한 적 앞에서 세대 내부의 연대로 뭉쳤던 것과 달리, 오늘의 Z세대는 기성세대를 향한 세대 갈등과, 같은 세대 안에서 물려받는 부와 성별을 축으로 갈라지는 세대 내부의 갈등을 동시에 짊어지고 있다.
프랑스 Z세대는 2023년 마크롱 정부가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늦추는 연금개혁을 밀어붙였을 때, 노총이 주도하던 전통적 시위 구도를 넘어 대거 거리로 나섰다. 흥미로운 것은 청년 시위대 스스로 이 장면을 68혁명과 겹쳐 읽었다는 점이다. 한 시위 참가자는 “68년에 늙은 대통령 드골이 있었듯, 마크롱도 노년층의 표로 당선된, 청년에게 말을 걸지 않는 대통령”이라 말했고, 정부가 의회 표결 없이 헌법 49조3항을 발동해 법안을 강행 처리한 것은 반세기 전 드골이 의회를 무력화하고 권력을 대통령에 집중시켰던 제5공화국의 권위주의적 법치 구조를 그대로 연상시켰다. 이 갈등은 시위가 끝난 뒤에도 봉합되지 않았다. 2025년 10월 앵스티튀 몽테뉴 조사25)에서 연금개혁에 찬성하는 65세 이상은 49%인 반면 25~34세는 28%에 그쳤다. 기후 위기 앞에서도 청년층의 위기감은 뚜렷하다. 2025년 11월 Ipsos 조사26)에서 프랑스 청년의 79%가 지구온난화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25) 엘라베(Elabe)가 《레제코(Les Echos)》·앵스티튀 몽테뉴(Institut Montaigne)·라디오 클라시크(Radio Classique)를 위해 매월 실시하는 정기 여론조사(월간 바로미터)의 2025년 10월판 참고.
26) Ipsos BVA가 “앙트르티앙 드 루아요몽(Entretiens de Royaumont)”을 위해 2025년 11월 실시한 위험인식 국제조사(11개국, 총 11,000명 대상)의 프랑스 청년 응답자 결과. 지구온난화는 청년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과학 주제 1위로 나타났다(79%, 그중 40%는 “매우 관심 있음”).
그렇다고 프랑스 Z세대가 경쟁과 생존 압박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대입 선발 제도를 둘러싼 스트레스와 생활비 부담은 이들에게도 실질적인 위협이다. 그러나 이 불안은 개인화된 경쟁이 아니라 거리의 집단적 요구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한국 Z세대와는 다른 경로를 걷는다.
반면 한국 Z세대는 저출생과 가혹한 승자독식 경쟁 사회 속에서 생존을 이어왔다. 이 때문에 한국의 Z세대는 공공 복지 확대를 위해 연대하기보다는, 한정된 사회적 자원을 안전하게 배분받기 위한 ‘절차적 공정성’(K-능력주의)의 확립에 집착하는 양상을 보인다. 비슷한 불안 앞에서 한쪽은 국가를 향해 함께 목소리를 냈고, 다른 한쪽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규칙을 정교화하는 쪽을 택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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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의 신분사회 – 상속, 부동산, 이중 노동시장
세대 간 배신이라는 서사를 감정의 언어에서 제도의 언어로 옮기면, 그 메커니즘은 세 가지 법적 장치로 구체화될 수 있다.
첫째는 상속·증여 과세 체계다. 프랑스와 한국 모두 명목상의 최고세율은 높지만, 생전 증여 공제 주기의 반복 활용이나 가업승계 특례와 같은 합법적 절세 통로가 폭넓게 열려 있어, 68세대·86세대가 축적한 부동산과 금융자산이 사실상 과세 공백 지대를 통해 다음 세대로 이전되고 있다.
둘째는 부동산 관련 법제다. 임대차 보호와 재건축 규제, 종합부동산세를 둘러싼 입법 공방의 실질적 수혜자는 대개 이미 자산을 보유한 기성세대이며, 청년 세대는 자산 형성의 출발선 자체에 접근하지 못한 채 임차인의 지위에 고착된다.
셋째는 노동법상의 이중구조다. 정규직에 대한 강력한 해고 보호와 연공서열형 임금체계는 68세대·86세대가 청년기에 확립한 제도의 산물이지만, 오늘날 그 보호는 이미 진입한 내부자에게만 적용되고, 청년 세대는 기간제·플랫폼 노동이라는 보호 바깥의 영역으로 밀려난다. 법률가의 시선에서 보면, 세대 갈등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구체적인 조세법·부동산법·노동법의 설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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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주년 기억의 온도차 – 프랑스·독일·미국 여론조사
정치적 실패와 문명사적 승리, 그리고 그 승리자들의 배신이라는 세 겹의 서사를 시민들은 실제로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68혁명 50주년이었던 2018년, 세 나라에서 각각 실시된 여론조사는 이 질문에 대한 흥미로운 답을 보여준다.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긍정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해리스 인터랙티브가 《르 누보 매거진 리테레르》 의뢰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93%가 5월 혁명을 알고 있다고 답했고, 그 중 79%가 프랑스 사회에 미친 영향을 ‘대체로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부정적 평가는 17%에 그쳤다)27). 다만 이 평가는 세대와 정치 성향에 따라 뚜렷하게 갈렸는데, 75세 이상(1968년 당시 이미 성인이었던 세대)과 우파 성향 유권자일수록 부정적 평가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비슷한 시기 비아부아스 연구소가 《리베라시옹》을 위해 실시한 조사에서도 프랑스인의 70%가 5월 혁명이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답했고, 응답자의 67%는 이를 당시 시위 참가자들의 ‘성공’으로 평가한 반면, ‘실패’로 답한 응답은 13%에 불과했다28). 두 조사 모두,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프랑스인 다수에게 68혁명은 여전히 ‘옳았던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7) 해리스 인터랙티브(Harris Interactive)가 《르 누보 매거진 리테레르(Le Nouveau Magazine Littéraire)》 의뢰로 2018년 2월 5~6일 실시한 여론조사(응답자 2,007명, 18세 이상 대표 표본, 할당법).
28) 비아부아스 연구소(Institut Viavoice)가 일간지 《리베라시옹(Libération)》을 위해 2018년 실시한 여론조사(응답자 약 1,000명, 2018년 5월 2일 발표).
독일에서는 결이 조금 다른 조사 결과가 나왔다. 통계 전문 기관 슈타티스타가 유고브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약 75%가 1960년대를 독일 사회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시기로 꼽았다. 구체적으로는 성 관념의 변화(64%),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변화(60%), 대중음악(45%), 전쟁에 대한 태도 변화(43%) 순으로 응답이 높았다29). 프랑스의 여론조사가 ‘정치적 옳고 그름’을 직접 물었다면, 독일의 조사는 68혁명을 ‘체제 전복’이 아니라 ‘일상과 문화의 조용한 재편’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살펴본 서독 68혁명의 이중적 결말(무장투쟁의 그늘과 녹색당이라는 결실)이 반세기 뒤 독일인들의 기억 속에서는 결국 후자의 문화적 유산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어 있음을 시사한다.
반면, 미국에서는 정반대의 정서가 두드러졌다. 킹 목사 암살 50주기를 앞두고 AP통신과 NORC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흑인 민권운동의 목표가 ‘대부분 또는 전부 달성되었다’고 답한 미국 성인은 30%(백인 35%, 흑인은 단 8%)에 불과했다30). 흑인 응답자의 4분의 3은 경찰의 공정한 대우 영역에서 진전이 거의 없었다고 답했고, 투표권 영역에서는 다수가 상당한 진전을 인정했지만 형사사법 영역에서 ‘많은 진전이 있었다’고 답한 비율은 4분의 1에 그쳤다. 프랑스가 ‘이미 완성된 승리’를 자축하고, 독일이 ‘조용한 문화적 재편’을 회고하는 동안, 미국은 오히려 ‘미완의 과제’로 1968년을 마주하고 있었던 셈이다.
29) 슈타티스타(Statista)와 유고브(YouGov)가 공동으로 2018년 5월 실시한 1960년대 사회변화 인식 조사.
30) AP통신과 NORC(시카고대학교 여론연구센터)가 2018년 3월 30일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50주기(같은 해 4월 4일)를 앞두고 발표한 여론조사.
이러한 온도차 자체가 왜 세 나라의 68혁명이 정치적으로는 나란히 패배했으면서도 그 유산에 대한 오늘날의 자기평가는 이토록 다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단서다.
에필로그 : 왜 상상력이 필요한가?
정치적으로 지면서 문명사적으로 이기고, 그 승리자가 다시 새로운 기득권이 되는 68혁명의 이중 삼중의 역설은, 상상력이 언제나 제도보다 늦게, 그러나 결국은 도착한다는 역사를 말해 준다. 그 기득권화는 추상적 배신이 아니라, 앞서 살펴본 상속·부동산·노동법이라는 세 겹의 구체적 장치를 통해 오늘도 진행되고 있는 현재형 사건이다. 이러한 역사는 오늘 우리가 마주한 문제들 앞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기후위기, 인공지능이 재편하는 노동의 지형, 세대 내부로 파고든 성별 갈등, 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저출생 사회. 이 모든 문제는 기존의 제도적 언어만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68세대가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시적 도발로 신체와 일상의 권위주의를 해체했듯, 오늘의 청년 세대에게도 기존 정치 문법을 넘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다만, 오늘날의 바리케이드는 68세대와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68세대가 맞선 권위주의는 국가와 대학, 가부장이라는 뚜렷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 청년들이 마주한 권위는 훨씬 익명적이다. 기후위기는 특정 정권이 아니라 산업문명 전체가 쌓아온 관성이 만든 위기이고, 인공지능이 재편하는 노동은 특정 자본가가 아니라 알고리즘이라는 비인격적 구조가 이끈다. 보도블록을 뜯어 던질 명확한 표적조차 없는 세대인 셈이다.
그럼에도 기후정의 운동은 ‘세대 간 형평성’이라는 권리를, 인공지능 담론은 노동의 자기결정권과 디지털 인격권이라는 개념을 이미 말하기 시작했다. 아직 어느 법에도 없는 개념이다. 68혁명이 법전보다 먼저 ‘나의 신체는 나의 것’이라는 자기결정권을 외쳤던 것과 같은 방식이다. 표적은 바뀌었지만, 상상력이 법과 제도보다 앞서 걸어야 한다는 구조는 반세기가 지나도록 변하지 않았다.
법이란 결국 한 시대의 상상력이 침전되어 굳어진 퇴적암과 같다. 오늘 판례집에 등장하는 자기결정권, 차별금지는 반세기 전 파리의 거리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오직 상상력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었던 개념이었다. 법률가의 임무는 이미 침전된 퇴적암을 정교하게 다루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아직 굳지 않은 다음 세대의 상상력이 어떤 언어로 침전되어야 할지를 함께 고민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68혁명이 법률가들에게 남긴 가장 실천적인 유산이다. 프롤로그에서 던졌던 질문 “우리는 지금 어느 법정과 어느 거리 사이에 서 있는가?” 에 답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 둘 사이 어디쯤, 이미 퇴적암이 된 법과 아직 굳지 않은 상상력 사이의 그 좁은 틈에 서 있다고.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 1968년 5월, 소르본 대학 벽면의 슬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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