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10주기, 추모를 넘어 제도화로 응답하라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인근 공용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되었다. 가해자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수사기관은 ‘묻지마 범죄’로, 사법부는 ‘심신미약’으로, 언론은 ‘조현병 범죄’로 이 사건의 본질을 가렸다. 가해자조차 인정한 ‘여자라서 죽였다’는 사실 앞에서, 국가는 여성혐오 범죄, 여성살해(Femicide, 여성이라는 이유로 혹은 여성에 대한 혐오와 지배욕을 바탕으로 여성을 살해하는 행위)라는 이름 붙이기를 끝내 거부했다.
그날로부터 10년이 흘렀지만, 여성들의 죽음은 멈추지 않았다.
2026년 5월 5일, 광주에서 10대 여성이 학교 앞에서 살해되었다. 가해자는 오랜 기간 다른 여성을 스토킹해 왔고, 사건 이틀 전에도 스토킹 피해자의 집에 침입하여 성폭력과 폭행을 가했으나, 신고는 사건화되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위험신호는 외면되었다. 진주 편의점, 부산 오피스텔, 인천 대학 캠퍼스, 서산 군부대, 대구·광주·제주의 친밀한 관계 살해 등 ‘강남역’은 한 곳에 있지 않았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25년 분석한 통계에서도 친밀한 관계 내에서 살해된 피해자만 최소 137명이었으며, 일면식 없는 남성에 의해 일어난 여성살해도 주변인을 포함해 94명이나 집계되었다. ‘강남역’은 도처에 있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지난 10년 동안에도 여성들은 끊임없이 광장에 모였다. 여성들이 강남역에 붙인 포스트잇 중 일부는 입법이 되고, 외침은 판례가 되었다. 스토킹처벌법이 제정되었고, 디지털 성폭력 처벌 규정이 신설되었다. 그러나 법은 선택적으로 만들어졌고, 여성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 강간죄 개정 등 여성폭력과 관련된 수많은 국민청원은 여러 차례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넘었음에도 국회의 입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우리 법체계는 여성혐오 범죄를 구조적 차별이 아닌 문제적 개인이 저지른 ‘개별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강간 피해자가 ‘충분히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는 판결문, 교제폭력을 ‘연인 간의 다툼’으로 격하한 불송치 결정문, 피해자의 과거 이력을 파헤치고 ‘피해자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가해자에게 온정을 베푸는 판결에서 보듯 사법제도는 여전히 성차별적이고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국회와 정부 역시 구조적 성차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이를 정치적 쟁점으로 소모하면서 실질적인 예방과 피해자 보호 정책을 후순위로 밀어냈다. 추모와 애도의 언어만으로는 부족하며, 사각지대에 방치된 입법적 공백을 실질적으로 메우기 위한 국가 차원의 책임 있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국제사회는 이미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되는 범죄를 ‘페미사이드(femicide)’로 규정하고, 가해자의 여성에 대한 편견과 혐오, 성폭력 동반 여부, 여성이라는 이유로 표적이 된 경우 등 젠더 기반 폭력의 맥락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 구조적 여성폭력의 결과로 분석하고 있다. 한국 사회도 이제는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페미사이드 개념과 통계 체계를 도입하고, 성차별적 동기에 기반한 여성살해를 국가 차원의 구조적 폭력 문제로 인식하는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여성혐오 범죄는 여성들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고 신변을 보호하도록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가 시민의 안전을 온전히 보장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의 본질인 성차별과 불평등의 관점에서 정책적 대응에 나서야 한다. 현행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친밀한 관계 내 폭력을 제대로 규정하고 가정폭력처벌법을 전면 개정하는 것, 형법상 강간죄의 성립 요건을 상대방의 동의 여부로 전환하여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하는 것, 공적인 공간과 영역 전반에서 여성이 안전할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성평등 가치를 기반으로 한 법률과 정책의 획기적인 전환만이 구조적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실질적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우리 모임은 10년 전 강남역에서 희생된 피해자와, 지금도 여성혐오와 차별 속에서 희생된 모든 이들을 깊이 추모하며, 이를 계속해서 기억할 것이다. 우리 모임은 법과 제도가 가부장적 권력과 차별을 공고히 하는 방패가 되지 않도록 끝까지 감시할 것이며, 나아가 국가가 구조적인 성차별 철폐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촉구할 것이다. 모든 여성이 혐오와 폭력으로부터 안전하고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끝까지 연대하고 투쟁할 것이다.
2026년 5월 18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윤복남
M20260518_[성명]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10주기, 추모를 넘어 제도화로 응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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