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강연 후기’

2008-01-10 131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강연 후기’

흐흐~ 또 기록을 갱신했습니다. 역대 월례회 참가자가 40명을 넘은 적이 없었는데, 딱 40명의 회원을 채우면서 재작년 정혜신 박사 강연 이후 최대 인원이 참가했습니다. 물론 참가인원보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뜨거운 열기였습니다. ‘시대의 증언’이란 주제도 주제려니와 1년 전만하더라도 한국말이 서툴던 서경식 선생이 유창한 모국어로 가슴 속 가장 깊숙한 곳에 차곡차곡 쌓아오신 신념을 쏟아냈기 때문일 겁니다. 바로 곁에서 사회를 맡은 저는 전율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이야기는 이탈리아 국적의 유대인 쁘리모 레비가 죽음보다 고통스럽다는 아우슈비츠를 견디고 견뎌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생환을 하였는데 수용소를 나와서 40년이 지나 결국 그를 자살에 이르게 한 것은 무엇인가, 도대체 레비에게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것이 무엇이었나 하는 화두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해방되자 마자 아우슈비츠의 실상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이것이 인간인가’를 발표하면서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온갖 고통과 치욕을 버티게 한 것은 ‘불길한 미래에 대해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극단적인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은 소위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란 장애를 겪게 됩니다(이건 지난 정혜신 박사 강연의 주제였지요). 아우슈비츠와 같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절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이 사람들을 레비는 두 가지 부류로 나눕니다. 하나는 죽을 때까지 기억을 지우려고 애쓰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경험을 기억해내고 증언하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잊고자 애쓰는 사람들은 팔뚝에 새겨진 수인번호부터 온갖 방법으로 지우려고 애를 쓰지만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게 됩니다. 가슴 속의 응어리를 쌓아가는 거지요. 반면 증언을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증언할 때 마다 기억이 눈앞에 재생되어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응어리를 조금씩 풀어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지요. 보통 용기로 가능한 것은 아닐 겁니다. 레비는 후자의 선택을 하였기에 죽을 때까지 증언을 자기 임무로 살아왔습니다.

그는 독일패전으로 아우슈비츠가 과거의 일로 끝났고 앞으로는 없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오히려 과거에 있었던 일이므로, 그 과거는 지금과 다르지 않은 인간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므로 (인간이 변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 다시 재현될 수 있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의 공분을 일으켰고, 그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아우슈비츠를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기억의 재생으로 인해 고통에 떨면서도 공감하는 사람들 앞에서 희망을 발견하고는 아마도 희미하게 웃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는 상당히 낙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증언자들 중에도 비관적인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자신의 증언을 통해 불길한 징조를 보이는 세상에 희망을 만들 수 있다고 굳게 믿었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1987년까지만 유효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과거의 기억은 흐려지고, 젊은이들은 레비류의 증언에 대해 지겹다며 외면하기 시작합니다. 쁘리모 레비에게 희망의 빛도 아스라해집니다. 시간이 갈수록 인간들은 더욱 격렬하게 싸웁니다. 급기야 1982년엔 아우슈비츠의 피해자로 구성된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고 복수라도 하듯 사람들을 학살하였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쁘리모 레비는 정성껏 쌓아왔던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듯 길바닥에 주저 앉아 오열하며 학살을 중단하라고 철군하라고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그의 절규는 철저히 외면 당했고 역으로 수용소에서 같이 고통 받았던 동료들에게서까지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사태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세상은 갈수록 공멸의 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했겠지요. 1986년에 독일에서 벌어진 소위 ‘역사가 논쟁’은 쁘리모 레비의 마지막 희망을 조금의 온정도 없이 훅, 꺼버린 사건입니다. 과거의 가해자들까지 자기를 정당화하는 주장을 하고 재건을 도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수파 역사학자들은 ‘나치범죄는 러시아 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 ‘비극은 인류역사상 항상 있기 마련’, ‘독일만 비난 받을 일 아니다’라는 논리에 근거하여 ‘독일국민의 긍지를 회복시켜야 한다’며 득세한 것입니다. 독일은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레토릭으로 아우슈비츠를 상대화하고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위르겐 하버마스 등의 엄격한 비판을 받고 학문적으로는 패배하였지만 독일 국민의 가슴엔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신나치당, 스킨헤드’같은 움직임이 이를 반증하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을 쁘리모 레비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을 겁니다. ‘결국 독일은,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극심한 절망감과 피로감, 공포에 시달렸을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해 다시 살아가던 아파트 5층에서 몸을 내던져 자살을 하고 맙니다.

결국 처음 질문에 대한 답, 학살의 현장에서도 살아남은 그를 자살로 몰아간 것은 ‘과거를 망각하고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인간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곧바로 가스실로 보낼 유대인들을 수용하는 곳 정문에 ‘ARBEIT MACHT FREI(노동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라는 표어 쓸 수 있을 만큼 파렴치한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고향에 묻힌 쁘리모 레비의 묘비 한 가운데에는 그의 팔뚝에 새겨져 있던 수번 174517이 뚜렷하게 음각되어 있습니다. 유언도 남기지 않은 레비였으므로 자신의 묘비에 수번을 새겨달라고 주문을 하진 않았을 테니 그를 묻은 부인과 동료들의 ‘죽어서도 증언한다’는 생각이었겠지요. 과연 극도의 피로와 절망으로 자살을 선택한 그가 그것을 바랬을까 하는 답 없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서경식 선생은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간절하게 쁘리모 레비를 통해 ‘과거를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쁘리모 레비와는 다른 경로를 통해 기억하기도 싫은 고통을 겪었던 사람이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국적과 무관하게 한국과 일본 사이 그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는 디아스포라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박정희가 일본에 대한 책임요구를 포기한 것, 그로 인해 일본의 자기반성은 최종적으로 불가능해진 것, 90년대 들어와서 보수파들에 의해 과거 증언, 반성에 대한 반발이 본격화된 것을 통해 일본과 독일을 비교하였습니다. 선생의 설명은 영상물과 버무려져 더욱 실감나게 피부에 와 닿았습니다.  

서선생은 쁘리모 레비와 달리 스스로를 비관주의자라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상당히 어둡고 침울합니다. ‘나의 서양미술 산책’에서 그가 선정한 그림들은 치르듯 아픈 그림들입니다. 저 역시 그리 낙관적이지 못한 탓에 쁘리모 레비의 증언과 인간에 대한 서선생의 비관적 해설을 비관적으로 서술하기만 하였습니다. 사실 서선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대의 증언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디아스포라의 현실을 알리는 동시에 그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라고 어디선가 언급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과 일본, 다수파와 소수파, 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는 제3영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외국에 살면서 국적까지 바꾸더라도 완전히 그 ‘외국인’이 될 수 없는 디아스포라, 그들의 자기 모순을 극복하는 방법을 서선생은 그 ‘외국인’이 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또는 반대로 ‘모국인’임 억지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디아스포라임을 받아들이고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 디아스포라의 삶을 더욱 진지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서선생의 말씀이 우리에게 또 다른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고민하고 공부할 일은 많습니다.

이번 강연은 공부모임과 월례회를 겸한 자리라서 회원들의 다양하고 풍부한 생각을 나누지 못한 아쉬움이 남긴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가 신선하기도 했습니다.

다음 공부모임은 사진작가 활동을 하다가 현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는 이시우의 ‘민통선 평화기행’을 들고 강원도 철원으로 향할 겁니다. 7월 7일(토) 아침 8:30분에 법원 정문 앞 정곡빌딩으로 오시면 턱~하니 대형버스와 제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시우를 대신하는 사진작가와 이시우의 처가 동행하면서 그가 발로 걸었던 길을 따라갈 겁니다. 그리고 그가 영상에 담았던 분단의 현실을 사진에 담아볼 겁니다.

그리고 공부모임은 7월 18일 저녁 7시엔 다시 민변에서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가지고 토론을 할 겁니다. 저자 이진경을 초대할 예정입니다. 물론 섭외가 된다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