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대법원장의 신임대법관 제청을 재고할 것을 촉구한다

2003-08-19 246

대법원장의 신임대법관 제청을 재고할 것을 촉구한다
– 전면적인 사법개혁의 계기로 삼아야

신임 대법관 제청과정에 대해 법원내외부의 비판과 반발이 계속되었다. 강금실 법무부장관과 박재승 변협회장의 자문위원 사퇴에 이어 현직부장판사가 대법원의 관료적 폐쇄성을 비판하며 사직했고 급기야 159명에 이르는 소장판사들이 대법원장에게 제청 재고를 요청하는 연판장을 제출하기도 했다. 일찍이 대법관 임명의 개혁을 요구한 시민사회와 학계 그리고 재야법조계 역시 실망과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이처럼 이번 대법관 제청은 시민사회는 물론이거니와 법조삼륜, 심지어 법원내부 구성원의 동의조차 얻지 못함으로써 사법부의 권위를 스스로 훼손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같은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이 대법원에 있다고 본다. 사법부의 개혁을 바라던 국민의 기대와 법원 구성원들의 열망을 송두리째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번 대법관 제청과정에 각계의 요구와 비판이 봇물처럼 쏟아진 이유는 ‘개혁’이 시대적 화두로 등장한 시점에서 이뤄진 첫 번째 대법관 인선이 지니는 상징성 때문이다. 이와 함께 사회적 다양성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한 기존 대법원의 인적구성을 정상화하는 것이 사법개혁의 첫걸음이라는 사회적 인식 때문이다. 연공서열에 따른 대법관 인선 관행의 탈피 여부는 사법부의 자기 변신 의지를 가늠할 수 있는 시험대였다. 아울러 기본권 보장의 최후보루로서의 권한을 행사하는 대법원의 역할에 비춰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보호에 대한 신념과 사법개혁의지 등을 갖춘 인물이 신임대법관으로 임명되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동안 대법원의 태도가 이같은 요구와 기대로부터 벗어나 있었다는 점은 대법원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사법부는 법이라는 전문성의 울타리를 핑계로 그 어떠한 외부의 비판과 견제에 대해서도 눈감은 채 내부입장만을 주장해 왔다. 뿐만 아니라 사법개혁에 대한 거센 압력에 직면할 때면 이를 사법권에 대한 침해로 호도함으로써 그 예봉을 피해가는 모습을 보여왔다. 따라서 이번 파동은 대법원의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태도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사법부 역시 국민적 동의와 이에 기반한 내부 구성원의 합의 없이는 그 정당성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상식을 재확인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이러한 요구와 비판을 철저히; 무시한 체 종래의 서열논리만을 고수하고 있으며, 제청과정에 대한 내외부의 비판을 권한 침해라며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주어진 권한을 행사함에 있어 내외부의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 내 권한행사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갖춰야 함은 당연한 것이며, 부적절한 권한행사를 비판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주권자의 권리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법원이 밝힌 대법관 인선 기준인 재판실무능력 역시 대법관의 자질로 간과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는 대법관 인선기준의 하나일 뿐이며, 지금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오히려 다양성과 개혁성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이 같은 비판에 대해 대법원은 차기 대법관 인선이나 헌법재판관 지명에서는 재판실무능력 외 다른 인선 기준들을 고려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추후에는 가능하지만 지금 당장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이유와 대법원의 역할과 위상이 헌법재판소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의 인선기준에 차이를 두는 것을 우리로서는 납득할 수 없다.

우리는 시민사회의 인선기준이나 추천인물이 절대적이라거나 대법원이 이를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대법원이 시민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최소한 시민사회가 제시한 인선기준과는 다르다 할지라도 나름의 합리적이고 개선된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제청과정에는 기존 연공서열 중심의 인선관행만을 고수했을 뿐 사회적으로 동의를 얻을만한 어떠한 기준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한편 대법원은 어제, 법원내부 반발의 심각성과 중요성을 의식해 ‘판사와의 대화’를 개최했다. 하지만, 이 회의 역시 참석자들의 구성 등에 있어 대표성 문제와 함께 회의의 성격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 이유와 과정이 어떠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대법원이 ‘판사와의 대화’라는 형식적 절차를 빌어 법원 내부의 반발을 무마시켰다는 석연찮음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법원의 미봉책이 외부로부터의 사법개혁 요구까지 잠재울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법원 내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 역시 차단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이번 파동으로 인해 현재 사법시스템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더 이상 이러한 문제는 외면할 수 없는 개혁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번 사태를 계기로 폐쇄적이고 관료적인 연공서열식 법관인사제도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한 직급제 폐지, 법조일원화 실현뿐만 아니라 사법제도 전반의 개혁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가 이뤄져야 한다. 그럴 때만이 계속해서 사법개혁을 외면하는 대법원의 움직임을 견제할 수 있고, 동시에 개인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사법개혁을 부르짖은 법원 내부의 목소리들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법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특별기구의 구성 등 특단의 대책을 촉구한다.

우리는 이제라도 대법원이 전향적인 태도로 후보자 제청을 재고하기를 강력히 촉구한다. 만일 대법원이 법원 내, 외부의 변화와 개혁의 요구를 거부한다면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한다. 더불어 사법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대법원은 법원 내외부로부터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열린 자세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동떨어져 자신만의 아성(牙城)을 유지하려 든다면 사법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날이 갈수록 더해질 것이다. 특히, 법원 내부의 자성의 목소리조차 담지 못할 경우, 심각한 내부 문제로 비화될 소지가 큼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이번 파동이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대법원의 위상을 재확립하는 계기가 되기 위해서는 전면적인 사법개혁을 추진하는 길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2003년 8월 19일

민주노총,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원회, 한국여성단체연합, 환경운동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