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서]호주제폐지를 강력히 촉구한다
<성명서>
호주제폐지를 강력히 촉구한다.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법무부의 민법개정안이 2003. 9. 4. 입법예고되었다. 이보다 앞선 2003. 5. 27.에는 호주제 폐지 및 자녀의 성(姓)과 본(本)을 부모의 협의에 의하여 정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 개정안이 국회의원 발의안으로 국회에 제출되기도 하였다.
이번 민법 개정안은 그 동안 호주제로 인하여 고통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염원을 담은 것으로서, 양성평등한 가족제도를 실현하고자 하는 법무부와 여성부의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이제는 국회가 답을 하여야 할 차례이다. 우리는 국회의원들이 긴 안목으로 무엇이 남성, 여성의 평등사회를 실현하고, 현실의 다양한 가족을 반영할 수 있는 합리적인 신분등록제도인지 판단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호주제도는 일제시대에 일본식 가(家)제도를 식민지 조선에 정착시키려는 목적 하에 일제에 의해 도입된 제도이다. 호주제도는 원산지인 일본에서 천황을 주권자로 하는 가족국가관의 기초를 세우는 역할을 하여 오다가, 1948년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식민지의 잔재인 호주제도를 미풍양속인 것처럼 오인하여 지금까지도 이를 폐지하지 못하고 있다.
호주제도는 현실의 가족과는 거리가 먼 추상적인 “가(家)”의 개념을 설정하고, 호주가 가(家)의 우두머리가 되고, 나머지 가족구성원들은 호주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본이념으로 한다. 또한 호주를 정점으로 하여 나머지 가족구성원의 순위를 정함으로써 존엄한 인격을 가진 개인들이 평등한 지위에서 가족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제도로서, 민주적 기본질서를 규정한 헌법전문 및 제4조에 위반된다.
호주제도는 가족구성원의 지위를 호주에게 종속시킴으로써 개인의 자율적인 법률관계 형성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열등한 지위를 강제하여 개인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을 규정한 헌법 제10조에 위반된다.
호주제도는 남성에게 호주가 되는 우선적인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합리적 근거 없이 아내의 지위를 남편보다 하위에, 어머니의 지위를 아버지보다 하위에 위치하게 하는 등 양성평등에 명백히 반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성별에 의한 차별을 금지한 헌법 제11조 제1항과 개인의 자율적 의사와 양성의 평등에 기초한 혼인생활과 가족생활의 자유로운 형성을 보장하는 헌법 제36조 제1항에 위반된다.
우리사회의 가족제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개인의 권리를 부득이 제한할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호주제도는 정당한 기본권제한이 아닐 뿐만 아니라 기본권의 본질적 내용까지 침해하고 있어 과잉금지원칙을 규정한 헌법 제37조 제2항에 위배된다. 법원에서도 이러한 이유로 호주제도를 규정한 민법 제778조와 부성강제주의를 규정한 민법 제781조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신청을 한 상태이다.
이처럼 위헌임이 분명한 호주제도를 유지하여야 할 아무런 명분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급속하게 변화하는 가족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호주제도를 계속 유지하여야 할 실익도 없다. 호주제도는 남아선호를 조장하여 기형적인 남녀성비구조와 여아 낙태라는 참혹한 인권유린을 낳고 있으며, 남성 우월주의,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가족주의, 가족내에서의 성별에 의한 차별 등 각종 부작용을 야기함으로써 근대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로의 진전을 가로막는 역기능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일각에서 마치 호주제도가 폐지되면 가족이 해체되는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화에 따른 전통적 대가족의 붕괴와 핵가족, 이혼, 독신가정 등의 증가로 인한 가족관계의 변화는 호주제도와는 무관한 것이다. 호주제도가 유지되고 있음에도 현실의 가족은 계속 변화해왔고, 앞으로도 변화해 갈 것이다. 호적부에 “호주”와 “가(家)”라는 봉건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을 둔다고 하여 전통적인 가족제도가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호주제도로 상징되는 기존의 가족질서야말로 민주주의적‧수평적 사고방식, 자기결정권에 대한 강력한 자각 등 가족구성원들의 의식변화를 수용하지 못하여 가족구성원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킴으로써 오히려 가족의 해체를 촉진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호주제도의 폐지는 우리의 가족제도가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족에서, 민주적이고 평등한 근대의 가족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어떤 이유로도 민법 제정 이후 수 십년 동안 비판을 받아온 호주제도의 폐지를 미루어서는 안 된다. 국회는 이번 회기 내에 반드시 호주제도를 폐지하고 현실의 다양한 가족형태를 반영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평등한 신분등록제도를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2003. 9. 9.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최병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최병모(직인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