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밖의민변]-법조기사의 문제점, 법조기자에의 당부

2002-01-08 110


다음은 월간 <시민과 변호사> 2001년 12월호에 특집으로 실린 박형상회원의 글입니다. “법조기사의 문제점, 법조기자에의 당부”라는 제목으로 실린 이 글은, 현재 법조기사·기자의 문제점과 바라는 바 등에 대해 짚고 있습니다.


●전문성 결여●


법조영역 자체가 전문영역인만큼 기실 법조기사 영역을 취급하는 법조기자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전문성이 필히 뒷받침되어야 한다. 늘 강조하지만 ‘피의자, 피고, 피고인’도 구별 못하는 기자들의 무지 때문에, 형사소송법 민사소송법에 대한 초보적 지식의 결여 때문에 기자 자신의 본래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부정확하고 불공정한 기사가 되고 마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변호사·소송대리인·변호인’, ‘국제변호사(?)·미국변호사’, ‘소장·공소장·고소장’, ‘참고인·증인’, ‘증명·소명’, ‘주장·입증’, ‘기각·각하’, ‘보상·배상’, ‘조정·중재·판결·화해(협의·합의)’, ‘선의·악의’, ‘가압류·가처분’, ‘보전재판·본안재판’, ‘합법성·합목적성’, ‘통치권자(?)·통치행위’, ‘국제법·국제사(司, 私)법’, ‘파탄주의·유책주의’, ‘법·법률·규칙’, ‘출석요구서·소환장’ 등 기본용어 정도를 기자 자신들로부터 구별할 수 있을 때라야 좀 더 정확하고 분별력있는 기사를 쓸 수 있을 일이다.

위와 같은 전문용어들이 법조기사 지면에 그대로 등장할 필요는 없다해도 적어도 법조기자의 머릿속에서만큼은 그 법리적 의미, 관행적 의미에 대하여 나름대로 소화시켜 두어야 한다.

●획일주의, 국가주의 사고방식●


우리 기자들은 검사나 판사 개개인을 그 자체로서 개별적인 고유직분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국가조직의 수직적 구성원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너무 강하기에 걸핏하면 ‘엇(헛)갈리는 처분, 모순된 판결’이라는 자극적인 표제를 등장시키는 것 아닌가 싶다. 어떤 분쟁사안에 대하여 최종적으로는 대법원이 교통정리할지언정, 또한 일관성있는 보편적 법리적용이 물론 바람직할지언정 검사나 판사들 각자의 법적 양심과 소신에 따른 것이라면 능히 다른 판단이 가능할 것임에도, 그리고 이것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님에도 우리 기자들은 그저 ‘서로 다르다’는 것 한 가지만으로 뉴스가치를 부여하며 ‘모순, 혼돈, 갈등’이라고 단순화시켜 버린다. (행정부서를 비판할 때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처음부터 분명하다면 우리가 왜 판사를 바꾸어가며 재판을 세 번씩이나 받아 보겠는가. 부산에서 도망친 탈주범이 서울에서 제깍 잡히는 사회, 이른바 범죄없는 마을이 반드시 더 자유로운 곳일까.

출입처제도의 일사불란함을 과시하는 우리 기자들은 신문과 방송 모두를 통해 똑같은 한 목소리로 떠들어대며 ‘여론재판’을 시작한다. 그들은 마치 ‘모두가 같아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에 푹 빠져있는 듯하다. 같은 법조기자실 안에서도 서로 다른 식견을 드러내는 기자는 언제쯤이면 나타날까.

●팩트(fact) 지상주의 병폐●


한국기자들이 즐겨쓰는 ‘Fact’가 그 자체로서 꼭 진실이라거나 정의일리 없을 것임에도 오로지 ‘기자 자신이 직접 보고 체험했다는 fact’라는 미명하에 이른바 ‘팩트’만을 대서특필해 버린다. 눈에 보이는 사회현상에 관한 구조적 원인 및 배경이나 제도적 대안을 따져보지 아니한채 오직 fact를 취재 보도하기 위해 폭탄주를 마시고(한편, 취재원과 폭탄주를 마시는 것 자체가 이미 fact라고 말해진다) 거기서 수집되는 가십거리마저도 fact라고 소중해한다.

이렇듯 ‘fact지상주의’에 젖다보니 한쪽 피해자가 그 억울함을 호소해오면 반대쪽 이해 당사자를 상대로 확인·대질 취재해 보아야 옳을 것임에도 그 피해자가 눈물을 흘리는 것 자체를 fact로 여기는 입장인지라 ‘일방 피해자와의 일정한 거리두기 원칙’을 잊은채 한쪽 주장만 가득 채워져 있는 고소장이나 소장을 그대로 베껴쓰고, 수사실적을 과시하고자 하는 검사의 수사발표문을 그대로 받아쓰고 만다.

‘선정성있는 흥밋거리’이면 더 좋은 뉴스 가치가 있는 fact라고 생각하게 된다. 도대체 누가 한국 시자들에게 한국식 fact를 가르쳐 주었을까. (외부 압력을 배제한다는 측면에서 fact 보도원칙의 효용성은 일부 있다)

●기자 직분에 대한 열정의 과욕●

시간에 쫓기고 지면에 제약되는 기자들의 직업적 고충을 감안한다 하여도 어떤 사안의 중간 절차나 연속적 과정을 외면한채 결론만을 크게 단정적으로 보도하는 나쁜 습성이 있다. 너무 어렵게 쓰여진 판결문 쪽에도 분명 그 책임이 있을 것이나 결론만을 편향적으로 축약해서는 안된다. 또한 우리 기자들 역시 ‘소송절차의 동태적 발전과정 – 경찰, 검찰, 1심, 2심, 3심 절차’에 다시금 그 생각을 가다금어야 한다. 무죄추정의 원칙, 익명보도의 원칙 앞에서 기자의 열정을 자제해야 한다. 지금 당장의 눈에 보이는 중간 결론에만 짜맞추어 구둣발로 파리를 짓이기듯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된다.

함부로 단정하는 이런 풍토는 ‘사실의 중립적 전달자’ 쪽보다는 ‘진실의 확정자’ 쪽에 기자 직분의 비중을 두어 온 그간의 한국적 언론 전통에 기인할 터이다. ‘사실의 전달자’ 아닌 ‘진실의 확정자’ 쪽에 서게 되면 상대방의 ‘반론’을 실어주는 것을 ‘자존심의 손상’으로만 여기며 ‘정정’에 응하는 것을 ‘패배’라고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어찌하랴, 시간에 쫓기고 지면에 제약되고 전문성이 부족하기 쉬운 기자 입장에서 오보는 그 직업적 숙명이라 할 수 있거늘.

특종에의 열정이 곧 특종오보에의 첩경이 될 수 있다.

‘진실의 확정자’ 쪽만을 계속 하다 보면 ‘절차적 정의-취재수단의 합법성’을 무시하기 일쑤이고, 그 비판의 상대방에게 ‘한심한-, 나사 풀린-, 정신나간-‘이라는 식의 감정적 언사로만 매도하게 된다.

●법조기자에의 당부●

넓게 보아 기자들이나 법률가들이나 둘다 사회 공익의 추구자들이지만 ‘한 발 앞서서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점’에선 기자들의 지사적 열정이 법률가들의 수구적 태도보다는 한결 더 가치있을지 모른다. 다만 기자들이 법조관행이나 법률가들을 더 날카롭고 유의미하게 비판하고 전체 사회의 공익을 구현하는 법조기사를 쓰기 위하여는 귀동냥, 눈대중 수준을 벗어난 ‘체계적인 공부(?)’를 하여야 한다. ‘무고한 시민의 억울한 옥살이 버전’ 기사를 쓰려거든 ‘형사재판 절참, 검시의 제도 및 재심제도의 문제점’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양형 문제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기사도 그렇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식의 원색적이고 도발적인 용어보다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감시작업에 의거한, 세심한 양형자료 확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단순한 사건기사나 재판기사는 통신기자 쪽에 넘기되 부디 법조기자들은 받아쓰고 베껴쓰고 대충쓰지 말지어다. 대신 심층분석기사를 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