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보고서] ’97 표현의 자유

2001-12-06 63

1. 머리말

표현의 자유는 가장 간단하게 말한다면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이다.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과 의견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이 최소한의 존엄을 누리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자유이다. 이 표현의 자유는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기본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주사회의 기본인 여론의 형성과 민의의 결집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요청되는 헌법적 필수제도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회가 민주화되고 발전될수록 표현의 자유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인 탄압이나 물리적인 억압의 강도는 줄어드는 대신, 법규범의 형식적 적용에 의한 간접적이고 합법적인 표현의 통제가 주로 이용되고, 더불어 거대 언론의 상업성과 선정성이 표현의 자유를 오히려 그 근저에서부터 회의하게 만드는 국면이 벌어진다. 그러나, 분단체제가 가장 엄혹한 정치적 현실로 자리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여전히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양심수라는 이름으로 혹은 국가보안사범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다. 나아가, 이른바 문민정부의 마지막 임기였던 1997 연도에는 ‘사회윤리’의 수호라는 명목하에 예술가의 표현에 가해진 보수계층의 공격과 대선 운동 과정에서 노골화된 상업언론의 불공정 보도의 문제가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또 하나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이하에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 학문과 예술, 출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자유에 대하여 차례로 살펴본다.

2. 사상, 양심의 자유

가. 1997 년 양심수 관련 상황 개관

(1) ‘양심수’라는 개념은 엄격한 법적 정의를 가지고 있는 용어는 아니나,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군사독재정권을 거치면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인사들, 기타 통일운동이나 노동운동 등 사상적 지표를 가진 진보적 운동의 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하여 생명과 신체에 위협을 받거나 불이익을 당한 인사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 1997년에는 우리 사회에서 양심수의 개념을 놓고 때아닌 논쟁이 벌어졌으나, 그 논쟁의 과정은 유감스럽게도 대단히 정략적이고 반지성적인, 냉정하게 말하자면 대선을 앞둔 선거운동 과정에서 치졸하게 전개된 한판 말장난으로 오히려 양심수라는 언어가 갖는 인간적, 사상적 무게를 모독하는 결과만을 낳았다.

양심수를 둘러싼 논쟁은 1997. 10. 31.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광주지역 텔레비젼 토론회에서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 조국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사람을 석방, 사면시키겠다”는 극히 원론적인 발언을 조선일보를 비롯한 극우언론과 정치권 일각이 문제삼기 시작하면서 발단되었다. 김대중 후보의 발언으로 촉발된 정치권의 양심수 논란에 대하여 민가협, 민주노총, 경실련, 참여연대 등은 즉각 정치권의 치졸한 논쟁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1997. 11. 7. 대한성공회 대강당에서는 민변, 참여연대, 민가협,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이 공동주최한 ‘양심수 문제 긴급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이 토론회에서는 양심수에 대하여 국제 앰네스티의 정의, 즉 “폭력을 주창하거나 직접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신념이나 인종, 언어, 국적, 사회경제적 지위 때문에 감금된 사람들”이라는 정의에서부터 “표현의 자유가 온전치 못한 우리나라에서는 폭력을 주장했다고 하더라도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양심수로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전개되었다. 이 토론회는 이전까지 다소 막연한 범주로 사용되어 왔고, 그럼으로써 극우주의자들로부터 ‘반사회적 폭력사범을 양심수라는 이름으로 미화한다’는 비판을 가능하게 하였던 양심수의 다소간 모호했던 개념에 대하여 공개적인 토론을 통하여 일정한 개념적 범주를 마련하고자 했던 거의 최초의 공개적 논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토론회가 개최된 계기 자체가 당시의 정략적 논의에 대한 반대 체제로서 이루어졌던 것인 만큼 깊이 있는 논의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고, 적극적으로 양심수에 대한 공감의 폭을 넓혔다기보다는 정치권이 정략적으로 양심수의 문제를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소극적이고 원론적인 차원의 논의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논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위와 같은 양심수 논란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사회는 아직까지 양심수에 대한 이론적 접근보다는 당장에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할 너무도 많은 양심수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우리 사회의 정치권과 보수언론이 사상이나 양심의 자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피상적이고 천박한 시각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글에서는 ‘타인의 신체나 재산, 또는 기타 사회적인 구체적 법익을 현실적, 폭력적으로 침해한 것을 주된 이유로 한 것이 아니고, 특정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 또는 그 사상을 언술, 또는 행동으로 외부적으로 표현하였다는 사실을 주된 이유로 하여 구속, 기소되거나 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을 일응 양심수의 범위로 정의하고자 한다. 그렇게 정의하였을 때, 양심수란 무엇보다도 특정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국가 권력에 의하여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양심수의 수치는 일응 우리 사회의 법제도나 법현실이 개인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하여 얼마 만큼의 관용을 가지고 있는가를, 다시 말하여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적 사회’와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를 나타내주는 직접적인 바로미터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 우리 사회의 법률현실상 양심수는 통상 시국, 공안사범의 이름으로 처벌되어 왔다. 공안사범을 처벌하는 법률들의 이름은 대체로 국가보안법, 집시법, 도로교통법, 노동관계법 등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물론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광범위하게 양심수를 양산해 온 것은 국가보안법이었다. 1997년 1월부터 8월까지 공안사범으로 구속된 총 구속자 수는 모두 1,008명이었는데, 그 중 국가보안법 위반이 414명, 화염병처벌법 위반이 159명, 집시법 위반이 385명, 노동관계법 위반이 2명, 기타가 48명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자가 전체의 41%를 차지하고 있다. 1997. 8. 말 현재 전국 교정시설에 수감되어 있는 공안사범은 모두 919명이며, 국가보안법 위반이 504명, 집시법 위반이 134명, 화염병처벌법이 103명, 노동관계법 위반이 34명, 공무집행방해 등 기타 144명이며, 공안관련 수배자는 총 75명으로서 그 중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가 50명에 이른다.

1997 한해 동안 구속된 양심수는 총 1,376 명으로 집계되었는데, 이는 하루 평균 약 3.8 명 꼴로 구속자가 양산된 것으로서, 노태우 정권 후반기인 1991 연도의 구속자(1,356 명 ; 하루평균 3.7 명)와 1992 연도의 구속자(1,145 명 ; 하루 평균 3.13 명)보다도 문민 정부 말기에 더 많은 구속자가 발생한 것이다. 월별 구속자 수를 보면 1 월과 2 월, 3 월에는 각각 23 명, 31 명, 70 명에 그치던 구속자 수가 4 월과 5 월에는 각각 101 명으로, 특히 6 월에는 443 명으로 급증하고 있다. 이는 4 월에 있었던 황장엽의 망명 직후 한총련 좌익사범 합수부를 좌익사범 합수부로 확대 개편하면서 사회 전반에 좌익사범 수사를 확대한다는 대검찰청 공안부의 수사확대방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한총련 출범식을 전후한 5 월과 6 월에 구속자 수가 급증하였는데, 이는 공안당국이 한총련 와해를 목표로 마구잡이식 구속 수사를 감행한 것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5, 6 월 동안의 구속자 수는 1997 연도 전체 양심수 구속자 수의 32.3 %를 차지한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 따르면 1993 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1997. 8. 1. 현재까지 구속된 양심수 총원은 3,775 명(국가보안법 위반 1,669 명)이며 1997. 12. 현재 전국의 교도소 및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양심수의 수는 9 백 여명이다. 그리고 1997. 12. 5. 현재 기결수는 2 백 22 명에 달하는데, 그 중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1 백 74 명으로 전체 수감 양심수의 약 19 %, 전체 기결수의 약 78 % 에 이른다. 특히, 10 년 이상의 장기수가 53 명, 우용각 씨(남파간첩, 40 년 복역)등 30 년 이상 복역한 초장기수만도 16 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나. 사상전향제도와 보안관찰제도

(1) 위에서 개관한 바 있는 장기수감 양심수들은 비인간적인 장기 수감 그 자체로 심각한 반인권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게다가, 장기수감의 이유가 이른바 사상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을 때, 이는 적극적으로 사상의 전파를 억압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의 내심에 있는 양심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신체의 자유를 비인간적인 기간동안 제한하는 것으로서, 가장 기본적이고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인권조차 보장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상전향을 강제하는 제도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의 하나로 여전히 존치되고 있다.

사상 전향 제도는 이미 오랜 기간 동안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선의 여지없이 존속하고 있는 제도이므로, 새삼스레 그 제도 전반을 살펴볼 시의성은 없을 것이다. 현재도 행형법에 근거하여 제정된 법무부령인 ‘수형자분류처우규칙’ 제 2 조 제 5 호는 “자유민주적기본질서를 부정하면서 그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내용의 범죄를 범하고도 개전의 정이 없는 자”들에 대하여는 접견, 서신이용, 소내 시설물 이용 및 운동이 제한되고 독방에 수감되는 등 행형법에 의한 일체의 혜택이 부여되지 않는다. 1997. 8. 현재 위 수형자분류규칙 제 2 조 제 5 호에 해당하는 수형자는 190 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가석방심사등에관한규칙’ 제 14 조 제 2 항에 따라 사상전향서를 제출하지 아니하면 사실상 가석방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2) 국가보안법이나 그외 일정한 형법, 군형법 상의 일부 죄목(보안관찰 해당범죄)에 의하여 처벌받은 사람들은, 법률에서 정한 형이 모두 집행되고 석방되더라도 다시 “보안관찰”이라는 이름으로 주거 이전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에 심각한 제한을 받는다. 법무부 소속 보안관찰처분심의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법무부장관은 재범의 위험성을 이유로 2 년 단위로 보안관찰처분을 명할 수 있고, 보안관찰처분을 받은 자는 면제결정을 받기 전까지는 각종 인적사항과 각종 활동 상황, 국외 여행이나 주거 이탈 상황 등을 주거지 관할 경찰서장에게 신고하여야 한다. 이는 사법부의 판단없이 법무부 장관의 결정만으로 개인의 기본적 자유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위헌적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보안관찰처분 면제 결정을 받기 위하여는 “법령을 준수할 것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제출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를 규정하고 있다.

1997. 11. 27. 헌법재판소는 서준식 씨가 청구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전원합의체 재판부는 “보안관찰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 입법 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되며, 보안관찰 대상자가 지고 있는 신고의무는 필요, 최소한의 제한이다”라는 요지로 보안관찰법에 대하여 합헌결정을 내렸다. 특히, 전향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를 감시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청구인의 주장에 대하여 헌법재판소는 “보안관찰처분은 대상자의 내심의 자유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보안관찰처분 대상자가 보안관찰해당범죄를 다시 저지를 위험성이 내심의 영역을 벗어나 외부에 표출되는 경우에 재범의 방지를 위하여 내려지는 특별예방적 목적의 처분이므로 이 법상의 보안관찰처분이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규정에 위반된다고 할 수 없다.”라고 판시하였다. 위와 같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실제로 보안관찰법이 형식적인 신고의무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대상자의 활동 자체를 제한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제한을 벗어나기 위하여 사상적 전향을 강제하고 있다는 점 등을 간과한 것이라는 면에서 비판의 소지를 안고 있고, 위 합헌 결정에도 불구하고 그 결정 이유가 그 동안의 위헌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을 만큼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보안관찰법의 반인권적 위헌성의 문제는 앞으로도 쉽사리 불식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 주요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1) 인권운동가 서준식씨 구속, 기소

1997 연도에도 여전히 이적단체구성, 이적단체가입, 이적표현물 제작, 배포, 소지 등 ‘전통적인’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거나, 기소되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중에서도 국가보안법이 가장 자의적으로 적용된 한 전형적인 예로써, 서준식씨(49, 인권운동사랑방 대표)의 구속, 기소를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국내의 대표적인 인권운동가를 자의적이고 형식적인 법집행을 통해 구속, 기소한 사건으로 국, 내외의 수많은 시민단체와 인권운동단체, 예술단체의 격렬한 항의를 불러일으키며, 정권이양을 앞둔 이른바 문민정부의 인권의식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해 수준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 되었다.

1997. 11. 4. 서울경찰청 보안수사대는 제2회 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인 서준식씨를 국가보안법등의 위반혐의로 체포하였고, 다음날인 11. 5.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11. 8. 구속적부심이 기각되었고, 11. 28. 서울지검 서부지청 김용호 검사는 서준식씨를 구속기소하였다. 적용법조는 국가보안법 제 7 조, 보안관찰법, 음반및비디오에관한법률(음비법), 기부금품모집규제법,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현주건조물침입) 등의 위반혐의였다. 서준식씨가 집행위원장을 맡은 제2회 인권영화제는 개막부터 음비법이 위헌임을 주장하며 음비법에 따른 사전심의를 거부했다. 사전심의를 받지 않은 영화상영은 허가할 수 없다는 홍익대 측의 불가통보에도 불구하고 영화제 집행부는 9. 27.부터 홍익대에서 영화 상영을 강행하였다. 검찰이 적용한 범죄사실은 사전심의를 받지 않고 비디오물을 상영하였다는 점(음비법 위반), 장소 사용을 불허한 홍익대에 무단침입하였다는 점(현주건조물침입),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피보안관찰 대상자로서 집회 참여 및 해외여행시 관할 경찰서장에게 신고하지 않았다는 점(보안관찰법 위반), 신문광고를 통하여 영화제 기부금을 조성하였다는 점(기부금품모집규제법 위반), 그리고 제주도 4.3 항쟁을 다룬 영화로서 이적표현물에 해당하는 <레드 헌트>를 영화제에서 상영하고 해설책자를 제작, 소지하고 있었다는 점(국가보안법 위반) 등이었다. 음비법 등 기타의 여러 적용 법률들은 이미 위헌의 소지가 농후하거나 사실상 사문화되었던 법률들이거나 또는 단순히 절차적인 법률들에 불과한 것들로서, 사실상 서준식씨를 구속기소한 이유는 국가보안법 위반, 즉 영화 <레드 헌트>의 상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레드 헌트>는 이미 1997. 4. 18. 유선방송국인 큐채널의 주최로 개막된 제2회 서울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이었고, 김대중, 이회창 씨등 대선후보들까지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던 제2회 부산 국제영화제(1997. 10. 10. – 10. 18.)에 출품, 상영되었으며, 그 상영을 위하여 이미 사전심의까지 받았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특별히 1997 년 말에 가서야 서준식씨를 지목하여 위 <레드 헌트> 상영을 이유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한 것은, 그 시기에 발생한 이장희 교수와 박지동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 사건들에 대하여는 아래 3. 가. 항목에서 살펴보기로 한다)과 더불어 1998 연도의 대선을 의식한 공안몰이의 한 연장선상에 서 있는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그러한 정치적인 의구심을 떠나서라도, 이미 공개적으로 심의, 상영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관람한 영화, 그것도 단지 제주도 4.3 사건을 다루었다는 것일 뿐 어떠한 사상적 편향성을 발견하기 어려운 영화에 대하여 그 제작자나 연출자, 기타 앞서 언급한 영화제의 관계자들은 전혀 문제삼지 않고 특히 서준식씨만을 지목하여 이적표현물 소지, 배포 혐의를 적용한 것은 극히 자의적인 법집행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이 사건을 통해, 국가보안법이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언제라도 원칙없이 적용될 수 있고 광범위하게 표현의 자유를 수시로 침해할 수 있는 악법이라는 점이 다시 한번 명백해 진 것이다.

(2) 이적표현물 관련 사건들

1997. 4. 15. 경찰청 보안국은 대학가 인문사회과학 서점을 운영하는 유정희(<그날이 오면> 대표), 은종복(<풀무질> 대표), 김용운(<장백> 대표) 등 3 인을 국가보안법(이적표현물 소지, 반포 혐의) 위반으로 긴급 체포하고 이들이 운영하는 서점에 대해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그러나, 위 3 인의 구속사유가 된 소위 이적표현물들은 <녹슬은 해방구 ; 정운상 저>, <국가와 혁명 ; 레닌 저>, <일보전진, 이보후퇴 ; 레닌 저> 등으로서 이들 책들은 이미 종로서적, 교보문고 등 시내 대형서점에서 판매되고 있고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져 판매되고 있는 책들이다. 서울경찰청은 1997. 2. 23. 북한 대학생들이 서총련에 보낸 새해 인사 편지를 교내 게시판에 게재한 덕성여대 총학생회장 김은희(21, 사회 4 년)씨를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소지, 배포 혐의로 구속하는 등 관련 사건으로 여대생 6 명을 구속하였고, 1997. 12. 28. 에는 백성기 씨등 4 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다. 구속사유는 미래정보센터에서 발간한 <미래통신>의 글들이 이적표현물이라는 혐의다. 그러나, 위 미래통신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신문, 잡지, 컴퓨터통신 등에서 수집하여 각 분야의 쟁점을 소개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간행물로서 그에 수록된 정보들은 컴퓨터 통신에서도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어서 실제로 간행물의 내용보다는 구속된 백씨등이 ‘사노맹’ 사건으로 구속된 적이 있었다는 점이 보다 실질적인 이유라는 의구심을 일으켰고, 여전히 명확한 기준없이 이중기준이 적용되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문제점을 보여주었다.

1997. 10. 9. 에는 정우창, 김남중, 이민재 씨등 3 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이들의 경우는 이들이 운영하던 <이웃출판사>가 1992 년에서 1994 년 사이에 <사회주의 서정시 강좌>, <조국통일론>, <통일만들기>, <벗이여 어서 오게나> 등 4 권의 책이 이적표현물이라는 혐의다. 그러나, 이들이 경영하던 이웃출판사는 경영난으로 1994 년 이후 책을 출판하지 못하였으며 결국 1997. 7. 폐업을 한 상태이고 이들 책들은 출판된 지 3 년에서 5 년이나 경과한 것들로서 절판되어 구하기조차 어려운 책들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은 경찰의 건수올리기 수사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한편, 법원에서는 <레닌저작선>, <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 <세계철학사>, <조국통일론> 등의 책들에 대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이미 그 허구성이 역사적으로 검증된 현 상황에서 우리나라 출판사들이 합법적으로 출판하여 시중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고, 국립중앙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어 일반인들에게 열람이 허용되는 이들 서적이 대한민국의 존립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만한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표현물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판결이 나와 검, 경의 위와 같은 원칙없는 이적표현물 검거 관행과 대조를 이루었다. 이전까지의 이적표현물 관련 무죄 판결에 있어서는 통상 그 무죄의 이유가 해당 서적의 이적표현물 여부를 적극적으로 부인한 것이 아니라 서적의 소지에 이적 목적이 없었다는 소극적인 이유에서였던 것에 비추어 보면 위 판결은 당해 서적들이 현재의 상황에서 이적표현물 자체로 볼 수 없다는 적극적인 판시를 한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위와 같은 법원 판결이 이후의 검, 경의 태도나 법원의 사건 처리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을 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3) 기타 국가보안법 위반 조직 사건

경찰청 보안국은 1997. 3. 18. 연방제 통일과 사회주의 실현을 목표로 ‘사회민주주의청년연합(사민청)’을 결성해 노조원 등을 상대로 사상학습을 시켜온 혐의로 이 단체 회원 14 명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 혐의로 구속하고, 4. 24. 에는 공산주의 전위정당 건설 등을 목표로 사상 학습을 실시하고 노학 연대투쟁을 전개해온 혐의로 서울대 학생연대 의장 오준호(21, 국문 4)씨 등 13 명을 구속했다. 서울경찰청 보안부는 1997. 2. 25. 전국학생연대(전학련) 핵심 간부 15 명을 체포, 이 중 전학련 제 6 기 준비위원장인 한기범(성균관대) 씨등 10 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고, 4. 4. 에는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목표로 전국학생정치연합을 결성해 반국가활동을 벌여왔다는 혐의로 위 단체 간부 10 명을 구속했다. 이 밖에도 부산지역 ‘빛나는 전망’ 사건, ‘노동자 진보정당 추진준비위원회(노진추)’ 사건, 상지대 ’21 세기 프로메테우스’ 사건, ‘노동정치연대’ 사건, ‘고려대 청년’ 사건, ‘한국노동청년연대’ 사건, ‘참세상을 여는 노동자연대’ 사건, ‘자주민주통일 애국청년선봉대’ 사건, ‘인천교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사건, ‘부산동아대 자주대오’ 사건, ‘부천민주노동청년회’ 사건, ‘코뮨주의 지하혁명활동가 그룹’ 사건, ‘단국대(천안)와 연세대(원주) 자주대오’ 사건 등 많은 국가보안법 조직사건이 있었다.

1997 년 한해 동안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자수는 674 명인데, 이 중 국가보안법상의 이적단체 구성, 가입(제 7 조 제 3 항) 혐의로 구속된 수가 315 명으로서 전체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자 수의 46.7 % 를 차지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특히, 1997 년의 이적단체 구속 사건의 특징 중의 하나는 단기동맹 사건, 빛나는 전망 사건 등 현재 활동 중인 조직이 아닌 3, 4 년 전에 이미 해체된 조직을 뒤늦게 문제삼은 사건으로 대부분의 구속자들은 졸업을 해 취직한 회사원이거나 활동을 중단하고 군입대를 한 학생들이라는 점이다. 또한, 노동정치연대, 노진추, 북부노동자회, 참여노련 등 공개적으로 회원을 모집하고 신문이나 컴퓨터 통신 등을 통해 활동을 공개하던 단체의 회원들이 이적단체 혐의를 입고 대량구속된 사건들이 많았다. 이는 경찰이 실적을 앞세워 무리하게 관련자들을 구속하고 사건을 양산해 내었다는 이 시기 사건들의 특징적 문제점을 보여준다.

3. 학문, 예술, 출판의 자유

가. 학문의 자유

1997. 11. 25. 서울지검 공안1부(김재기 부장검사)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통일교육교재 ‘나는야 통일 1 세대’의 저자인 한국 외국어대학 법학과 이장희(47, 국제법 전공) 교수와 이 책을 출간한 천재교육사 편집장 김지화 씨에 대하여 국가보안법 위반(이적표현물 제작, 배포)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서울지법 홍중표 영장전담 판사는 이에 대하여 이적성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하였으나, 검찰은 1997. 12. 3. 다시 구속영장을 신청하였다. 검찰의 구속영장 재신청 역시 서울지법 최중현 영장전담판사에 의하여 기각되었다. 기각 이유는 “이 책이 통일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시기에 어린이들의 통일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하여 저술됐고 책자의 전체적인 논조도 북한을 일방적으로 찬양, 고무했다고 보기 어렵다”라는 것이었다. 검찰은 결국 1997. 12. 29. 이장희 교수와 김지화 씨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불구속기소하였다.

검찰이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기소한 ‘나는야 통일 1 세대’는 이미 1995 년 10 월부터 출간되어 각처에서 초등학생을 위한 좋은 통일교육교재라는 찬사를 받은 바 있고 심지어 통일원까지 이 책을 통일교육교재로 방송매체에 추천한 바 있다. 그런데도, 발간된 지 2 년이 지나 이 책의 내용에 대하여 일부 극우보수 언론이 악의적인 비난을 시작하고 뒤이어 검찰이 이를 문제삼아 두 번의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영장을 발부받지 못하자 불구속 상태에서 기소까지 실행한 것은, 검찰을 비롯한 수구보수세력이 한반도의 통일문제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극단적인 반동적 시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아가, 이 사건은 상식적인 판단으로도 국가보안법을 적용하기에는 대단히 무리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연말 대선을 앞두고 검찰이 또다시 공안몰이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이 사건에 뒤이어 1997. 11. 28. 광주지검 공안부는 광주대학 박지동 교수(58, 언론대학원장)가 집필한 ‘진실인식과 논술방법’에 대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 광주지법 장병우 영장전담판사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박교수를 구속하였다. 위 ‘진실인식과 논술방법’ 또한 1997. 4. 에 발간되었고, 1997. 5. 말에 이미 전남지방경찰청에서 수사를 시작한 바 있다. 검찰은 박교수를 입건 이후 기소하지 않고 있다가 1997. 11. 말에 가서야 이장희 교수의 구속영장 신청과 일치되는 시기에 박교수에 대하여도 구속영장을 신청하였다는 점에서 공안정국의 조성을 위한 시도라는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논술교재로 집필되어 다른 논문을 다수 인용하고 있는 이 책이 새삼스레 이적표현물이라는 검찰의 주장도 설득력이 없거니와, 박교수는 구속 당시 지병인 고혈압과 심근경색을 앓고 있었고, 현직 교수인 대학언론원장의 신분으로서 도주의 우려가 없었던 점, 이적표현물로 지칭된 ‘진실인식과 논술방법’이 이미 출간되어 대학 교재로 사용되고 있었으므로 증거인멸의 우려 또한 없었다는 점 등에서 박교수의 구속 청구와 영장 발부는 순수한 법리적인 판단으로만 보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1997 년에도 대학가 서점을 대상으로 한 경찰의 압수, 수색이 계속되었다. 경찰이 이적표현물로 압수한 책들은 대부분이 이미 출판된 지 10 여년이 지난 것들로서 국내 유명 서점에서도 아무런 문제없이 판매되고 있으며, 전국의 다수 대학에서 학업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책들이었다는 것은, 공안당국의 학문과 사상의 자유에 대한 몰이해가 어느 정도인지,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이 이 시대에도 어떻게 자의적이고 시대착오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건들이었다. 1997. 11. 29. 경찰청 산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실시한 대학가 서점에 대한 일제 압수, 수색에서 압수된 도서 목록 중에는 다음의 서적들이 포함되어 있다. – <한국민중사 I, II>, <세계철학사 I - III>, <사람됨의 철학 I>, <북한현대사>,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녹슬은 해방구>, <강좌철학>, <한국민중사 I, II>, <역사와 계급의식>, <트로츠키>, <자본론 I - III>, <철학의 기초이론> 등.

나. 예술의 자유

(1) 영화의 사전 검열과 개정 영화진흥법

1996. 6. 헌법재판소의 역사적인 영화진흥법(구 영화법) 위헌 결정이 있었다. 그 결정에 따라 오랜 기간 우리 영화의 발전을 가로막아온 주범이었던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는 국가에 의한 검열임이 명백해졌고, 위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우리 영화,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의 표현의 자유의 발전에 대한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위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1997. 3. 17. 국회를 통과하여 4. 10. 공포되고 1997. 10. 11.부터 시행된 개정 영화진흥법은 위와 같은 헌법재판소의 역사적 의미를 전혀 구현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사실상 이전의 사전검열 제도를 여전히 존치시킴으로써 역사적인 헌법재판소 결정의 취지에 반하는 사실상의 위헌적인 법률이 되고 말아 개정 직후부터 영화계를 비롯한 진보적 사회단체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즉, 개정 영화진흥법은 모든 영화에 대하여 국가기관인 공윤의 심의를 받도록 하고, 그 심의를 받지 않은 영화는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하였던 구 영화진흥법을 개정하여, 공윤 대신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이하 “공진협”)로 하여금 심의를 담당하게 하되 그 심의는 등급부여를 위한 심의로 하고, 심의를 받지 않고 영화를 상영하면 형사처벌이 아닌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을 그 개정 내용의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공진협 위원은 대한민국예술원회장이 추천하여 대통령이 위촉하도록 되어 있고, 국가가 공진협의 경비를 보조하며, 공진협은 심의결과를 문체부 장관에게 통보하도록 하는 등(공연법 제 25 조의 3, 동시행령 제 21 조) 실질적으로 공진협은 공윤과 다를 바 없는 국가기관의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또한, 등급심의라고는 하지만, 등급을 부여하지 않고, 3 개월에서 6 개월 사이의 기간 동안 등급부여를 보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종전의 검열과 마찬가지의 제도를 유지하는 결과가 되었다(개정 영화진흥법 제 12 조, 동시행령 제 13 조의 3). 영화 제작자들의 입장에서 3 개월에서 6 개월까지 등급을 부여받지 못하고 따라서 영화를 상영할 수 없다는 것은 영화제작에 투자한 자본을 회수할 수 없고, 당초 계획하였던 상영일정을 모두 변경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결국 영화의 상영금지 조치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개정 영화진흥법의 시행 이후 등급보류를 피하기 위하여 영화제작자들이 자진하여 영화를 삭제하는 ‘자발적 검열’이 영화계의 새로운 풍속으로 등장했다. 이에 영화인들은 현행 등급보류 제도는 직접적인 겸열의 형식을 피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영화인들에게 자발적인 형식으로 검열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악랄한 영화검열 제도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등급보류 제도를 폐지하고 그 대신 등급외판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등급외판정을 받은 영화들을 상영하는 전용영화관의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또한, 영화등급을 부여받지 아니하고 영화를 상영한 자에 대하여 1 억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한 것은, 구법의 형사벌 형식을 과태료라는 행정벌의 형식으로 바꾸었을 뿐 실제로는 과대한 과태료의 규정으로 인하여 심사 강제(결과적으로 등급을 부여받기 위한 자진 검열)의 결과를 낳게 한다는 비판이 있다.

(2) 동성애 영화들에 대한 상영불허

공윤은 1997. 6. 24. 홍콩 감독 왕자웨이(왕가위)의 영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대하여 ‘동성애를 주제로 한 영화로서 우리 정서에 반함’이라는 이유로 1 차 수입심의에서 불합격수입반려 판정을 내렸고, 7. 11. 의 2 차 수입심의에서도 같은 이유로 불합격판정을 내렸다. 공윤이 불합격판정의 근거로 내세운 이유는 이 영화가 변태적 성행위의 일종인 동성애를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1997 년 칸느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작품으로서 이미 그 예술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바 있는 데에다가, <크라잉 게임>, <결혼 피로연>, <필라델피아>, <바운드> 등 동성애를 주제나 소재로 한 작품들이 이미 여러 차례 국내에 개봉되었었다는 점에서 공윤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 어려웠다. 위 공윤의 결정은 개정 영화진흥법 하에서도 심의규정은 여전히 자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 한국 영화에 대한 등급심사제도의 도입문제와는 별론으로 외국 영화 수입과정에서의 ‘검열’ 문제는 여전히 구영화법의 제도대로 지속되고 있다는 현 심의제도의 문제점을 압축하여 보여준 사례였다.

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수입불허 판정과 더불어 당국의 동성애 영화에 대한 태도를 대표적으로 보여준 사건은 제1회 서울 퀴어영화제 상영불허 결정이었다. 당초 1997. 9. 19. 서울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퀴어영화제는 관할구청인 서대문구청이 공윤의 심의를 받지 않았음을 이유로 공연신고를 접수하지 않고 상영불허를 통보함에 따라 무기한 연기됨으로써 사실상 무산되었다. 공윤은 퀴어영화제 개막에 앞서 이미 동성애 영화를 모아 상영하는 퀴어영화제 같은 경우는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었다.

위 동성애영화들에 대한 상영불허는 1 차적으로는 여전히 몇몇 심의위원들에 의한 자의적인 검열이 가능한 현 영화심의 제도의 문제점을 드러내어 주는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위 사건들이 가지는 의미가 중요한 것은 영화심의 제도 그 너머의 우리 사회의 심층에 동성애자라는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의 문제’를 언제든지 ‘변태적 성행위’의 문제로 간단하게 왜곡, 판단할 수 있는 우리 정부, 우리 사회의 인권에 대한 편협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3) 표현의 자유와 음란성 시비

1997. 7. 1.부터 만화, 도서 기타 모든 종류의 청소년유해매체물을 유해 표시 없이 판매, 배포 등 유통시키는 행위에 대하여 엄격한 형사처벌을 과하도록 한 청소년보호법이 시행되었다. 그 직후 일본 폭력 만화를 폭력 교본으로 삼았다는 ‘일진회’ 사건, 10 대의 청소년들이 직접 출연, 제작한 포르노 비디오물 ‘빨간마후라’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청소년 보호와 음란 표현물에 대한 규제 문제가 사회적인 쟁점으로 부각되었고,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음란표현물을 제작, 배포하였다는 이유로 만화가와 작가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잇달았다.

서울지검 형사1부(윤종남 부장검사)는 1997. 7. 23. 인기 만화작가 이현세씨가 만화 <천국의 신화>에서 선사시대의 생활상을 묘사하면서 수간, 혼음, 강간 장면 등을 지나치게 자주 등장시키고 잔인한 폭력 장면을 과다하게 묘사해 청소년의 정서를 해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이씨를 소환 조사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만화가 박산하씨 역시 창작물 <진짜 사나이>에 대하여 유사한 혐의로 조사를 벌였다. 이어 서울지검은 8. 2. 일간스포츠, 스포츠서울, 스포츠조선 등 주요 스포츠 신문의 전, 현직 편집국장 3 명과 이들 신문에 <밤사꾸라> 등 만화를 연재한 강철수씨 등 만화가 8 명 도합 11 명을 미성년자보호법 위반으로 불구속기소하고 이들 3 개 신문에 대하여 각 5 백만원씩, 이들 신문에 만화 <대침몰>을 연재한 임재동씨 등 만화가 3 명에 대하여는 각 3 백만원씩에 같은 혐의를 적용 약식기소를 하였으며, 만화가 배금택씨와 위 3 개 신문의 광고국장 등 18 명에 대하여는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위 약식기소된 3 개 신문사와 만화가 3 명은 1997. 9. 12. 서울지법 형사12단독 박정헌 판사에 의해 직권으로 정식재판 절차로 회부되었다. 위 만화가들에 대한 검찰의 집중적인 사법처리는 성인만화가들의 집단 절필선언등 만화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청소년 문제에 대한 사회적 우려와 관심이 고조되는 상황을 타고 제일 만만한 만화를 표적삼아 마녀사냥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스포츠신문 연재 만화의 지나친 상업성과 선정성 등은 이전부터 청소년보호단체나 기타 사회단체들의 비판의 표적이 되어 왔던 만큼 표현의 자유를 빌미로 포르노에 가까운 만화들을 신문에 연재하는 것은 법적 재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강하게 제시되어, 표현의 자유와 한계에 대한 논쟁이 향후로도 쉽사리 정리되지 못할 문제임을 시사했다.

검찰은 또 소설가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하여 ‘문학의 탈을 쓴 포르노물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음란문서 제조등의 혐의로 1997. 1. 6.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신형근 서울지법 영장전담판사는 ‘증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신청을 기각했다. 이후 불구속 상태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검찰은 장정일씨에게 같은 죄목으로 징역 1 년 6 월을 구형하였고, 1997. 5. 30. 서울지법 형사6단독 김형진 판사는 “음란성 여부는 문학인등 특별한 사람이 아닌 일반인의 성적 정서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며 장피고인의 소설은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변태적이고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에 치중하고 있어 음란성이 충분히 인정된다. 피고인은 원색적 묘사를 스타일 문제로 돌리고 기존 가치의 파괴 등을 핵심 주제로 내세우지만 이는 목적만 정당하면 수단은 어떻든 상관없다는 안이한 생각이며 목적 또한 철저한 상업성이 엿보인다. 특히, 사회적 부작용을 독자 책임으로 돌리는등 법정에서도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장정일씨의 유죄를 인정 징역 10 월을 선고하면서 장정일씨를 법정 구속했다. 이후 서울지법 형사항소1부(재판장 한정덕 부장판사)는 1997. 7. 23. 장정일씨를 보석으로 석방했다.

예술 작품의 성적 표현의 한계와 관련된 문제는 어느 시기나 할 것 없이 늘 제기되어온 문제였지만, 위 일련의 사건들이 보여준 특징은 그것들이 특별히 ‘청소년 보호’라는 명분으로 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쟁점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문제를 시사하는데, 그 하나는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들의 탈선이나 반사회적 행동들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가장 커다란 사회적 문제의 하나로 제기되는 시점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고, 또한 그에 대한 보호책으로 정부나 우리 사회의 보수계층이 가장 손쉽게 생각해낸 것이 매체물을 규제하자는 방법이었을 만큼 표현의 자유가 가지는 무게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취약하다는 점이다. 위 사건들에서 문제가 된 작품들이 실제로 현실적인 사회적 유해성을 가질 만큼 음란한 표현물들이었는지의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각 작가들이 가지는 사회적 무게나 예술작품에 대한 섬세한 고려 없이 사법당국의 일방적인 자의적 잣대로 예술작품을 형사문제화했다는 점, 그리고 특별히 만화라는 예술 형식의 특수성을 정당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만화 일반을 유해한 표현물로 이해하고 이를 규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위 사건들의 처리 과정에서 보여준 사법당국의 인식 정도와 태도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별론으로 향후 끊임없이 제기될 표현의 자유의 한계와 관련된 사법적 문제들을 우리 사회가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문제는 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불투명한 채로 남아 있다.

(4) 청소년 보호법의 시행

1997. 7. 1.부터 청소년보호법이 정식으로 시행되었다. 청소년보호법은 청소년유해매체물과 더불어 청소년유해약물, 청소년유해업소 등 청소년에게 유해한 일체의 환경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고자 한다는 입법취지를 가지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청소년 보호라는 명분 하에 매체물 일반을 규제한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와 관련하여 심각한 우려를 낳게 하는 법률이다. 동법은 영화, 연극, 만화, 도서, 음악, 광고, 방송 등 사실상 우리 사회에 유통되고 있는 모든 매체물을 그 규제대상으로 하여(동법 제 7 조) 문화체육부장관 소속하의 청소년보호위원회 및 기타 간윤 등 각 매체물의 담당 심의기관들이 위 매체물들을 심의하여 그 유해성 여부를 결정하고(동법 제 8 조), 그 심의결과에 따라 청소년에게 유해한 것으로 판정된 매체물들은 판매, 대여, 방송, 배포 등 모든 유통행위에 엄격한 제한을 받게 되며, 그에 위반한 경우 형사처벌이 가능하다(동법 제 14 조 내지 제 20 조, 제 50 조 내지 제 52 조).

동법은 제정 단계에서부터 청소년보호라는 명분 하에 지나치게 광범위한 매체물 규제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청소년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 즉 건전한 사회환경과 교육풍토의 조성이라는 문제는 도외시한 채 청소년 문제의 해결책을 매체물의 규제에서 찾고자 하는 본말이 전도된 입법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나아가, 규제 대상인 매체물이 너무나 광범위하고, 심의기준이 모호하여 졸속 심의로 인한 표현의 자유의 위축과 청소년 보호를 빙자한 진보적 의사표현의 제한에 대한 우려 역시 심각하게 제기되었었다. 실제로, 청소년보호위원회는 1997. 7. 15. 동법이 시행된 지 보름만에 1,605 종, 약 5,100,000 여권의 만화에 대하여 전격적으로 청소년유해매체물 판정을 내림으로써 만화의 졸속 심의에 대한 우려를 현실화시켰다. 또한, 동법에 의하여 간행물에 대하여 정식으로 법적 심의권한을 부여받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이하 “간윤”)는 1997. 8. 19. 재야단체인 서울민주청년단체협의회(서청협, 의장 전상봉)의 계간 회원지인 <서울청년> 8 호가 동법 제 10 조 제 1 항 제 4 호 “청소년의 건전한 인격과 시민의식의 형성을 저해하는 반사회적, 비윤리적인 것”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청소년유해매체물 결정을 내렸고, 청소년보호위원회는 8. 25. 관보에 <서울청년> 8 호를 청소년유해매체물로 고시했다. 간윤은 위 계간지가 청소년에게 해롭다는 판정을 받은 이유로 미군철수 주장을 담고 있다는 점, 대선자금의 공개와 김영삼 정부의 퇴진 주장을 담고 있다는 점 등을 들었다. 간윤의 위와 같은 결정은 동법이 그 제정 취지와는 무관하게 진보적인 사회단체나 반정부 단체의 주장을 실질적으로 검열하는 장치로 기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4. 언론, 통신, 사생활의 자유

가. 언론 보도의 공정성 문제

(1) 우리 나라에서 언론 보도의 불공정성의 원인은 크게는 정부권력에 의한 직접적인 통제의 문제와 언론사 자체의 상업성 또는 보수반동성으로 인한 자체적 왜곡의 문제로 나타난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대 언론보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물론 정부에 의한 직접적인 언론 통제였다. 소위 문민정부에 들어서서도 그러한 관행은 여전히 지속되어왔고, 특히 1997 년 초 그 동안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김현철씨의 지역민방 및 케이블 텔레비젼 선정 과정에서의 개입 문제와 KBS 등 방송사의 경영진 선정에서의 개입 문제등이 드러나면서, 최고권력층이 방송사등 언론을 장악하여 보다 광범위하고 구조적인 방법으로, 그것도 대통령의 아들이 비정상적인 경로를 통하는 방법으로 언론 통제를 시도하였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97 년 언론 상황의 특징적인 현상은 역시 정부권력 만큼이나 거대해진 언론 권력에 의한 자체적인 여론의 왜곡과 불공정한 편향 보도 문제였다. 특히나, 김영삼 정권의 마지막 해인 동시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시기적 특징상 정권 교체 과정에서 언론의 자사 이익과 영향력 행사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기회주의적 편향 보도가 극심하였다.

(2) 우리 언론의 권력 편향적, 보수 편향적 보도 태도와 심층적인 고찰없는 피상적이고 일면적인 논조, 그리고 그로 인한 사실의 왜곡은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되어 온 문제이나 여전히 개선없이 계속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1996년 말 국회를 날치기 통과한 노동관계법의 문제점들에 대하여 1997 년 들어서도 국내외의 비판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국제 노동, 인권 단체들의 거센 비판에 대해 조선일보는 1997. 1. 12. 자 사설을 통해 “국제기구든 여론매체든 먼저 정확한 사실인식과 상황 이해부터 시작해야 한다. 국제기구와 단체들이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일방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요지의 논조를 펴고, 동아일보는 1997. 1. 13. 자 기사에서 “국제단체들이 노동법의 단결권 문제만을 거론하고 변형근로, 정리해고 등 파업의 최대 이슈엔 침묵하는 등 이들의 연대는 심정적 동조의 수준일 뿐이다. 개정 노동법이 변형근로제에 관한 한 대부분의 OECD 회원국들보다 근로자에게 유리하다”는 등의 주장을 하는 등 보수적인 언론매체들은 노동관계법의 문제들에 대하여 근로자들의 시각이나 객관적인 보도를 외면한 채 일부 보수층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일어난 인명 피해들에 대한 보도의 편향성도 여전하였는데,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은 1997. 6. 3. 한총련 시위와 관련 사망한 유지웅 상경 사건을 일제히 1 면 머리기사로 보도하고, 쇠파이프를 든 학생들과 쓰러져있는 경찰 사진을 바로 밑에 배치하면서 자세한 진상이 파악되기 전에 이미 유상경이 학생들의 집단 폭행으로 사망하였다는 단정적인 보도를 내보냈다. 그러나, 언론은 1997. 3. 20. 남총련 시위 과정에서 사망한 조선대생 류재을씨(20, 행정) 사건은 1 단 기사 정도로 보도하고, 1997. 6. 1. 경찰의 폭행으로 두개골이 파열된 이철용씨 사건 역시 1 단으로 처리한 바 있었다. 1997 년 말 이른바 IMF 사태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을 맞으면서도 언론들은 그와 같은 사태에 이르게 된 국내외적인 근본 원인을 나름대로의 시각을 가지고 독자적이고 심층적으로 규명하려는 노력은 전혀 없이, 그러한 상황의 모든 원인은 한국의 부패하고 전근대적인 금융, 사회구조에서 연유한다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언론의 시각을 그대로 추종하면서 일반 국민과 근로자들에 대한 고통 부담만을 강조하는 피상적인 보도 태도로 일관하는 문제점을 보여주었다.

(3) 97 년 대선 과정의 특징은 처음부터 야당 후보인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여론 조사에서 여당 후보를 앞서가기 시작했고, 국민신당의 이인제 후보 역시 신한국당의 이회창 후보를 앞서는 등 그 향방을 점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선거 사상 초유의 일로써 그간 대선 과정에서 일관하여 여당 후보에 대한 일방적인 편파 보도를 일삼았던 언론사들 또한 선거 초기 그와 같은 상황 아래서 눈에 띄는 일방적 보도태도를 보이기는 어려웠다.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는 1997 년의 대선 관련 보도가 1992 년의 대선 보도에 비하여 일반적으로 공정성 측면에서 진일보했음을 평가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에 대한 언론의 편향적 보도는 중립성을 가장하면서 보다 세련되고 교묘하게 지속되어 대선을 김대중-이회창 양자 구도로 몰고 가려는 보도 태도를 보여주었고, 선거 막판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다시 급상승하자 그와 같은 태도를 여과없이 노정시켰다.

조선일보는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기피 문제가 한창 쟁점화 되었던 무렵 <멋있는 대통령감 없나?>라는 제하의 칼럼기사에서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 병역 논란이 한국 정치의 논쟁 수준을 한없이 초라하게 추락시키고 있다.”는 요지의 기사를 실는 등으로 병역 시비의 쟁점 자체를 폄하하는 논조를 펴는 반면, 대통령 후보의 건강과 세금을 공개하자는 기사, 김일성 조문 사건에 대한 새삼스러운 문제 제기 기사 등을 통해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자질을 일방적으로 문제삼는 태도를 보였다. IMF 구제금융 신청 이후 신한국당의 책임론이 제기되던 시점에서는 “각 당의 대통령 후보들도 서로 오늘의 위기가 남의 당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손가락질하고 있는데, 국민의 처지에서 보면 다같이 국정에 참여해온 정치해온 사람들과 경제해온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 형편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라는 인식이 더 강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요지의 기사로 한나라당의 책임 문제를 희석화시키는 보도를 했다. IMF 사태를 놓고서는, 1997. 12. 2. 자 사설에서 “IMF의 처방은 우리 경제의 숨통을 끊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으므로 정부 당국자와 IMF 측의 추후협상이 요구된다”는 취지의 사설을 게재하고, 김대중 후보의 IMF 재협상 발언이 있자, 그 직후의 기사에서는 재협상론을 정치를 위해 경제를 파탄에 몰아넣는 무책임한 태도로 매도하고 그로 인해 한국의 해외신인도가 하락하여 외화난을 가중시킨다는 상반되는 기사를 실었다.

중앙일보의 경우, 대선 기간 동안 보여준 일방적인 이회창 후보 편향 보도는 위험수위에 달할 정도였다. 이회창 후보가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이후 1997. 7. 22. “부친 강직, 청렴성이 대쪽 밑거름”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일방적으로 이회창 후보를 미화하는 기사를 게재하는 것을 비롯하여, 심지어 이회창 후보가 당선되기 위하여 어떻게 지역구도를 이용하고, 여권 후보 연대를 이루어야 할 것인지를 신문 칼럼을 통해 공공연하게 기사화하는 만용까지 보여, 언론의 공공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1997. 11. 29. 국민신당은 중앙일보가 작성한 이른바 ‘이회창 경선 전략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보고서’를 입수, 공개하였는데, 그 문서에서는 이회창 후보 대선 전략의 기본적인 문제점과 개선방향 및 ‘말수가 적어 부담을 줄 수 있다’는 등의 세세한 스타일상의 문제점과 개선방향까지 지적하는 등, 단순한 내부 보고 문서라는 중앙일보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이회창 후보측과의 결탁을 의심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중앙일보의 대선 보도 태도에 대한 의구심을 한층 증폭시켰다.

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사례들은 대표적인 몇 가지 기사들만을 적시한 것이지만, 대선을 이회창-김대중 양자구도로 몰아가려는 언론의 태도는 일관된 것이었다. 더욱 문제인 것은 여론 조사의 이름을 빌린 지지율 보도에 있어서도 여론 조사의 기본을 무시하고 표본 오차 범위 내의 지지율 차이를 두고 “이회창 후보 1 위 부상”이라는 1 면 머리기사를 달거나, 1 위 후보가 다른 종합지지도와 단순지지도를 동시에 게재하는 등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를 위해 여론조사의 객관적 보도를 무시하는 사례가 빈번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중앙일보는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최악(15.1%)에 이르고, 이인제 후보와의 격차 또한 최대(16.2% 포인트)로 벌어졌던 1997. 10. 25.과 26.의 자체 여론조사결과를 조사만 해 놓고 보도하지 않기까지 했고, 일부에서는 이와 같은 언론의 보도를 두고 여론조사가 아닌 여론조작이라는 비판까지 제기되었다. 특정 후보를 위하여 여론 조사결과를 왜곡 보도하는 것과 더불어, 여론 조사의 기술적인 방법론 자체에도 큰 문제점이 나타났다. 언론의 속보경쟁과 독자의 흥미유발을 위해 여론조사의 기본조차 무시한 채 단 하루 만에 여론조사가 이루어지거나, 같은 날의 조사 결과가 10여 % 이상 차이가 나고, 조사의 표본 수가 도저히 대표성을 가지지 못하는 수백명에 불과한 사례가 적지 않은 등 흥미 위주의 보도만을 위한 날림 식의 여론 조사가 속출해 여론조사의 신뢰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었다.

대선 과정에서의 언론 보도 중 가장 커다란 문제 중의 하나로, 그리고 언론종사자들에게 치욕스러운 경험으로까지 남은 것이 1997. 10. 8. 방송 3 사가 7 시간 동안 합동으로 생중계한 한국논단 주최의 이른바 ” 대통령 후보의 사상 검증 대토론회” 사건이었다. 극우적인 잡지로 이름높은 일개 잡지사인 한국논단이 대통령 후보들의 사상검증을 하겠다고 나설 때부터 이미 그 내용이 어떠하리라는 것이 충분히 짐작될 만한 이 토론회를 방송 3 사가 7 시간 동안이나 합동으로 생중계한 배경도 의문이거니와, 사회를 맡은 한국논단의 발행인 이도형씨의 발언과 토론회의 내용은 우파냐 좌파냐의 사상적 편향성을 떠나 기본적인 토론회의 윈칙과 윤리가 완전히 무시당한 그야말로 극우 언론의 일방적인 선전에 불과하였다. 월간 ‘말’지는 1997. 11. 호에서 <1997 년 10 월 8 일, 한국의 민주주의는 능욕당했다>라는 제하의 비판 기사를 실었고, 방송 3사 노조와 언론노련, 각 시민단체 등은 방송 3 사에 대해 생중계를 결정한 배경을 밝히라고 촉구하는 한편, 극우 파시스트 집단의 선전을 위해 국민의 재산인 전파가 낭비된 것을 개탄한다는 취지의 각종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사회 전반에서 이 토론회와 이를 생중계한 방송사들에 대한 거센 비판이 제기되었다.

나. 언론보도와 관련된 구제신청의 현황

1997 년 한해 동안 언론중재위원회에 중재신청된 사건은 모두 490 건으로 1996 년의 556 건에 비하여 수적으로 상당히 감소하였다. 중앙일간지 중 중재신청 사례가 가장 많았던 신문은 중앙일보로 총 27 건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조선일보가 총 20 건이었다. 그러나, 일간지 71 종, 주간지 10 종, 월간지 10 종, 통신 1 종 등 총 92 개 매체를 대상으로 한 심의에서 인권침해를 이유로 언론사에 언론중재위원회가 시정권고를 한 사건은 469 건으로서 1996 년의 310 건에 비하여 무려 159 건, 비율로는 51.3%가 증가한 것으로 집계되어 중재신청 사건 수와는 별도로 언론에 의한 인권침해 사례가 결코 감소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정권고 사례의 증가율은 중앙지가 1996 년의 57 건에서 1997 년 114 건으로 100% 증가하였고, 지방지는 1996 년 247 건에서 1997 년 347 건으로 40.5%의 증가추세를 보였다. 중앙지 중 시정권고를 가장 많이 받은 신문은 서울신문으로 총 13 회였으며, 그 다음으로 경향신문이 12 회, 동아일보가 11 회, 중앙일보가 10 회였다. 중재신청된 사건들 중 총 10 건에 대하여 법원제소사건이 있었고, 그 중 3 건이 인용되고, 1 건은 취하, 2 건은 기각, 나머지 4 건은 1997 년말 현재 진행 중에 있는데, 인용된 3 건 중 용공시비를 불러일으켰던 한국 외국어대 이장희 교수와 관련된 사건이 2 건이었다.

다. 언론보도와 관련한 주요 판결

이장희 교수에 대한 용공시비를 야기했던 월간조선의 보도 등과 관련하여, 서울지방법원 제50민사부(재판장 이규홍 부장판사)는 1997. 11. 28. “월간조선이 1997. 9. 호에서 <어? 왜 빠졌지요? 그럼 공산주의가 좋은 나라인가요>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이교수가 <나는야 통일 1 세대>라는 책을 펴내면서 어린이들의 글을 일부 왜곡시킨 채 저자의 의도대로 이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보도하여 이교수에게 피해를 준 점이 명백하다”는 이유로 발행인인 조선일보사에게 이교수의 반론문을 게재하고 이를 이행치 않을 경우 월 2 천만원씩을 이교수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같은 판결문에서 이교수가 조선일보의 1997. 8. 29. 사설에 대하여 신청한 반론보도청구에 대하여는 사설내용이 기본적으로 사실의 적시가 아닌 의견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이교수의 신청을 기각하였다. 이 판결에 앞서 같은 재판부는 1997. 10. 31. 이교수가 월간조선의 1997. 7. 호의 기사 <추적, 통일원의 이상한 통일관-통일되면 수도와 나라꽃이 바뀌나요>에 대하여 신청한 반론보도 청구를 역시 인용한 바 있다.

언론보도의 명예훼손과 관련하여, 서울지방법원 제12민사부(재판장 서태영 부장판사)는 한국통신노조가 1995 년 파업당시 ‘노조원들이 명동성당과 조계사에서 농성을 벌인 것은 북한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는 박홍 전 서강대총장의 발언으로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박씨와 이를 보도한 중앙일보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박씨는 원고들이 청구한 7 천만원을 배상하라”고 원고승소판결을 내리고 중앙일보에 대하여는 “사실을 그대로 보도했고 이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는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 제10민사부(재판장 박인호 부장판사)는 1997. 12. 5. 미국 국적의 언론인 문명자씨가 월간조선 발행사인 조선일보사를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을 이유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 항소심에서 “비록 일부 기사가 사실이 아니고 문씨의 명예를 훼손한 점은 인정되나 기사의 작성 목적이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내용이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판단된다”는 이유로 문씨가 승소했던 원심판결을 취소하였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 사건 기사를 취재한 기자의 취재원에 대한 신뢰 정도, 평소 원고가 가진 북한에 대한 편향적인 시각과 행태 등을 종합하면 이 사건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그 내용이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되며, 기사 작성에 있어 취재원이 제공한 정보의 진실여부를 원고에게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이와 달리 볼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은 “평소 문씨가 가졌던 친북 성향”을 원고 패소 판단의 한 근거로 삼아 “취재원의 정보에 대한 진실확인 의무”에 대하여 구체적인 판단없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취재원에 대한 기자의 신뢰라든가 당사자의 평소 성향이라는 대단히 주관적인 판단을 근거로, 일간지나 방송과는 달리 월간지로서 상대적으로 충분한 사실확인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월간조선의 사실확인 의무 해태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도 없이(1 심 판결은 이 부분을 조선일보사 패소의 한 이유로 적시하고 있었다)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는 점에서 이 판결은 거대 언론에 의한 개인의 권리 침해문제를 법원이 너무 쉽게 간과하고 오히려 법원의 보수편향을 드러낸 것이라는 비판을 가능케 했다.

라. 통신의 자유

거대 상업언론이 여론을 주도하고, 소수자의 의사가 대변되지 아니하는 현실에서 컴퓨터 통신은 소수자의 의견이 가장 활발하게 표현, 전파될 수 있는 새로운 매체로 자리잡았다. 그와 더불어 이 새로운 공간을 검열하기 위한 정부의 시도 또한 점증되고 있고, 전기통신사업법 등을 근거로 수시로 통신상의 게재문을 삭제하고 특정 이용자의 통신 이용을 금지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위협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한 적법하고 명확한 기준의 확립이 절실히 요청된다.

(1) 전기통신사업법 제 53 조의 위헌성 문제

동법 제 53, 71 조는 “전기통신을 이용하는 자는 공공의 안녕질서 또는 미풍양속을 해하는 내용의 통신(‘불온통신’)을 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고, 불온통신에 대하여는 정보통신부장관이 통신사업자로 하여금 그 취급을 거부, 정지 또는 제한할 수 있도록 명령할 수 있고, 통신사업자가 이 명령에 위반한 경우에는 2 년 이하의 징역 또는 2 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동시행령 제 16 조에 따르면 “불온통신이란, 범죄행위를 하거나 범죄행위를 교사하는 내용의 전기통신, 반국가적 행위의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내용의 전기통신,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를 해하는 내용의 전기통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위 규정은 대부분의 검열관련 규정이 그러하듯 지나치게 모호하고 광범위한 내용으로 되어 있어, 구체적으로 무엇이 반국가적 행위가 되고, 선량한 풍속을 해하는 것인지 전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또한, 일단 정통부장관의 명령(실제로 수사기관의 요청 등에 따라)이 있으면 전혀 아무런 사법적 판단없이 일방적으로 통신 이용을 제한하고 이를 강제할 수 있어 행정부가 자의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위험이 심대하다. 실제로, 위 조항을 근거로 경찰청의 협조요청을 받아 정통부가 발한 명령에 따라 한총련 관련 통신 이용자들의 아이디가 무더기로 정지당하고 관련 게재물들이 삭제되는 사례가 발생하는 등 동 조항이 가지는 위험성이 현실화되는 사례들이 발생했고, 이 조항의 위헌성을 지적하며 이의 삭제를 요구하는 비판이 강하게 일고 있다.

(2) 주요 통신검열 사례와 판결

1997. 6.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참세상 등은 이들 피시 통신을 통해 한총련을 옹호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써온 사용자 최소 61 명 이상의 아이디를 사용정지하고, 이들에 의하여 게재된 100 여건의 글들을 무더기로 삭제하였다. 이는 전기통신사업법 제 53 조에 근거, 정통부가 경찰청의 협조 요청을 받고 위 통신사업자들에 대하여 통신 이용 제한 조치의 명령을 내린 것에 근거한 것이다. 1997. 12. 13. 에는 역시 전기통신사업법 제 53 조에 근거한 정통부의 공문에 따라 천리안의 한총련 아이디(SCHCY)가 사용정지당했다.

정통부는 또 1997. 9. 24. 검찰의 요청을 받고 유니텔등 국내 4 대 컴퓨터통신사에 공문을 보내 미국의 인터넷 사이트인 geocities(www.geocities.com)에 북한 관련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는 이유로 이 사이트에 대한 접속을 차단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유니텔, 나우콤 등에 의하여 위 사이트 접속이 폐쇄되었다. geocities는 전세계적으로 100 만명 이상이 이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정보 사이트의 하나로서 국내 이용자들에게 무료 계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정통부의 공문에 따른 위 폐쇄 조치로 인해 이 사이트에 무료 홈 페이지를 개설하고 있던 1,000 여명 이상의 이용자들이 홈 페이지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고, 기타 위 사이트를 이용하던 이용자들의 접근이 원천적으로 봉쇄됨으로써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 대한 국가권력의 검열의도와 그 방법상의 졸렬함으로 인하여 많은 비판을 불러 일으켰고, 향후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통신 수단에 대한 국가 권력 개입의 한계와 그 기술적 방법, 절차 등에 대하여 많은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한편, 통신상의 의사표현과 관련하여 1997. 4. 25. 대법원은 피고인 김동욱씨에 대한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공직선거법”) 및 명예훼손 사건 상고심에서 김동욱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씨는 천리안 가입자로서 1996 년의 제 15 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예정이었던 국민회의 소속 박지원씨에 대하여 천리안의 주제토론실에서 박지원씨를 당선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박지원이 과거 전두환 정권에 붙어 아부하였다”, “박지원의 수준이 꼭 자해공갈단의 수준이다”는 등 그에 대한 명예훼손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공직선거법 등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기소되었었다. 대법원은 김씨의 발언이 “사실을 적시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나아가 기고문 게재의 경위나 동기가 쌍방향적인 컴퓨터 통신에 있어 다른 통신가입자의 반박에 대한 대응이었다는 점등을 들며 김씨에게 박지원씨가 “당선되지 못하게 할 목적”이 있었다고도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같은날 서울지방법원에서는 역시 통신상의 기고문에 대하여 국가보안법 위반혐의가 적용되어 기소되었던 윤석진(28)씨에 대하여 무죄가 선고되었다. 윤씨는 1996. 9. 경 천리안 게시판에 북한 잠수함 사건에 대하여 “그들이 무장간첩일까?”라는 제하의 글을 게재하면서 당시의 정황을 근거로 북한 잠수함에 탑승한 이들이 무장간첩이 아닐 것이라는 요지의 글을 기고하여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하였다는 등의 이유로 기소되었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사후적으로 윤씨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 밝혀지기는 하였으나, 윤씨의 기고 당시의 상황으로는 여러 언론사들이나 국회의원들조차 잠수함의 침투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던 실정이었고, 윤씨의 발언은 당시의 언론보도를 토대로 여러 가지 가정법과 추측, 의문의 표현을 사용하면서 개인의 생각을 나름대로 근거를 대면서 표현한 것에 불과하므로 그것이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고무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판시하였다.

개인의 사생활을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통신감청과 관련, 정부가 1997 년 6 월말까지 한국통신 등에 요청해 실시한 통신 감청 건수는 2,391 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1,028 건보다 230% 증가했다. 이 가운데 1,264 건은 일반범죄 수사, 227 건은 국가안보 목적을 위해 통신감청을 했다. 하지만, 179 건은 감청을 시작했으나 48 시간 안에 법원의 허가를 받지 못해 중지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의 51 건에 비하여 무려 350%가 증가한 것으로 수사기관이 범죄 수사 목적이라는 이름으로 엄격한 기준 없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통신감청을 남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보통신단체연대모임 ’97 정보통신검열백서 설문조사팀이 1997. 8. 26. 부터 9. 13. 까지 실시한 통신이용자에 대한 검열 인식 정도와 실태 파악을 위한 설문 조사에서 이용자들의 65.2%와 63.0%가 국가기관과 통신 서비스사에 의한 검열에 대해 각각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라는 답변을 했다. 반면, “부분적으로 필요하다”는 의견은 각각 28.2%, 26.7%였다. 또 자신의 글을 올리면서 표현의 수위나 사용한 어휘를 조정한 경우가 있는가에 대해 61.6%가 그런 경험이 있다고 답해 많은 통신이용자들이 외부 검열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응답자의 28.2%가 긴장감이나 구속감을 의식, 자신의 글을 삭제한 적이 있다고 답하였다. 또, 이 설문에서 10 대 이용자들이 검열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성 이용자들이 남성 이용자들보다 평균 5-10% 정도 더 검열에 부정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설문 조사는 하이텔, 천리안 등 국내 대형 컴퓨터 통신사 이용자 중 무작위로 표본추출한 1,600 명에게 설문지가 발송되었으나, 회수된 설문지는 300 여통이었고, 그 중 실제로 최종 분석에 사용된 설문지는 273 개였다. 또한, 설문지상에 설문 주체가 검열철폐를 주장하는 단체임이 드러나는 등, 완전한 신뢰성을 담보할 수 있는 설문 조사 자료로는 부족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통신 이용자들이 국가기관의 검열에 대하여 가지는 인식이나 자기 검열의 폐해 등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시사하는 일응의 자료로서는 충분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 전자주민카드 법안의 통과

1997. 11. 17. 국회 본회의는 전자주민카드 도입을 주골자로 하는 주민등록법 개정안을 확정, 통과시켰다. 동법은 1998 년 12 월 1 일부터 시행하며, 지역별로 순차적으로 시행하되 2000 년 3 월 31 일까지는 전국적으로 주민카드 발급을 완료하도록 규정되어 있다(동법 부칙 제 1, 2 조). 전자주민카드 제도는 주민등록, 인감, 운전면허 등 개인의 사회활동과 관련되어 분산 관리되고 있는 다수의 정보를 하나의 전자카드에 통합하여 수록, 관리함으로써 분산 관리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고 경제적 효율을 제고하며, 범죄 예방에 기여할 수 있다는 취지로 1995 년경부터 구체적으로 그 도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위 제도의 도입방침을 밝힐 때부터 국내외 인권 단체들로부터 개인정보의 집중과 유출의 위험, 프라이버시의 침해 위험, 소수의 정부관료에 의한 정보의 독점과 그를 통한 개인 사생활의 감시와 통제에 대한 우려가 크다는 강력한 비판을 받아왔다. 특별히, 민변, 민가협, YMCA, KNCC 인권위원회, 정보연대 SING, 참여연대 등 16 개 시민, 사회단체들은 1996. 10. 14. ‘통합전자주민카드 시행 반대와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한 시민, 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전자주민카드의 위험성을 홍보하고 그 시행을 저지하기 위한 조직적인 노력을 벌여왔었다.

국회를 통과한 위 법안의 내용은 당초의 정부 방침에서 다소 수정되어, 당초 주민등록증, 의료보험증, 운전면허증, 국민연금증, 주민등록등초본, 지문, 인감 등 7 개 증명을 통합하려던 것을 의료보험증, 운전면허증, 국민연금증 등은 제외하고 주민등록자료와 인감 등만을 수록하도록 개정하였고, 주민카드의 소지 의무를 삭제하였다. 주민등록자료란 성명, 사진, 주민등록번호, 호주, 세대사항, 병역사항, 주민등록기관코드 및 지문을 의미한다(개정 주민등록법 제 17 조의 8, 제 17 조의 12). 그리고, 전자주민카드라는 명칭 대신 단순히 주민카드라는 명칭만을 사용하고 그 형식에 대하여는 전자카드의 형식을 가지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현재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형식에 수록 정보만을 변경하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명문의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당초 이 법안이 추진되어온 경위를 보면 주민카드란 곧 전자주민카드를 의미하는 것이 명확하고, 그렇다면 그 수록 정보에 다소의 수정이 있었다고 하여도 이 제도가 가지는 개인정보의 심대한 침해라는 본래의 위험성은 여전히 그대로 존치된다. 위 법안에 따라 본래의 정부 방침대로 전자주민카드의 도입이 강행될 경우 수많은 국내외 인권, 사회단체들의 거센 반발이 예상된다.

바. 방송법안의 보류

지상파와 공중파, 위성방송 등에 대하여 통일적인 규정을 마련하여 방송선진화를 추구한다는 목적으로 공보처를 중심으로 이른바 통합방송법안이 1995 년부터 적극적으로 논의되어왔다. 그러나, 통합방송법안은 1995 년과 1996 년에 각각 입법예고까지 하였으나, 신문사와 재벌의 위성방송 참여문제, 방송위원회의 독립과 권한 강화, 정부의 방송 통제 배제 등의 쟁점을 놓고 정치권과 여론의 이견이 좁혀지지 못하여 법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바 있었다. 1997. 6. 5. 정부와 신한국당은 당정회의를 열고 대기업과 신문사의 위성방송 참여를 주골자로 하는 단일방송법안을 임시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그러나, 1997 년 3 월 김현철씨의 방송사 인사개입 문제 등이 불거지고 방송사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의 배제가 다시금 쟁점화되면서 단일방송법안 처리 문제는 유보하기로 정치권의 합의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갑작스레 정부와 신한국당이 단일방송법안 처리를 서두르는 배경에 대하여 의혹이 제기되었고, 각 시민단체들과 방송사 노조들을 중심으로 방송법 개악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다. 결국, 1995 년 논의를 시작한 이래 가장 첨예한 쟁점이었던 방송 독립과 재벌 및 신문사의 위성방송 참여 문제에 대하여는 여전히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고, 연말 대선을 앞둔 정치권의 급박한 사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1997 년에도 역시 방송법안은 처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단일방송법 제정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는점에 있어서는 여론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고, 1997 년 대선에서 그동안 재벌과 신문사의 위성방송 참여를 반대해온 김대중 후보가 승리한 만큼 1998 년에는 단일방송법이 제정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5. 집회, 결사의 자유

(1) 집회 및 시위 관련 사건의 현황

1997. 7. 31. 현재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이하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인원은 608 명, 불구속된 인원은 1,068 명으로 집계되었다. 이는 1996 년 한해 동안 총구속자 수가 816 명, 총불구속자 수가 4,411 명인 것에 비추어 지난 해 동기 대비 집시법 위반 혐의의 전체적인 인원은 상당히 감소하였으나, 구속자수는 오히려 대단히 증가하였음을 보여준다. 위 같은 기간 동안 폭력이 행사된 시위는 총 589 회로, 화염병 시위가 165 회, 투석이 186 회, 각목이나 쇠파이프가 동원된 사례가 163 회, 철도나 도로점거 사례가 50 회, 시설피습이 25 회로 나타났다. 제 13 차 민가협 총회 보고서에 따르면 1997 년의 양심수 구속현황 중 집시법 위반이 797 명(58%)으로 구속된 양심수 중 가장 높은 비율을 기록했다. 1997. 1. 부터 6. 까지 신고접수된 집회 건수는 1,165 건으로 1996 년의 같은 기간동안 접수된 724 건에 비하여 60.9 %가 증가하였다. 그 중 허용된 건수는 1,155 건, 금지된 건수는 10 건으로 나타났다. 다만, 위 통계는 신고접수된 사안만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서 일선 경찰서에서 신고접수 자체를 자의적으로 거부하는 사례가 있음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집회, 시위가 금지된 사안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인천동부경찰서는 1997. 3. 25. 인천대 총학생회가 3. 27. 개최 예정으로 제출한 한총련 총궐기 집회의 신고접수 자체를 거부하였고, 시위 과정에서 체포된 김완태 군을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다.

(2) 집회, 시위의 폭력 진압 사례

1996. 2. 1. 부산역 광장에서 민주노총 부산양산지역본부와 한국노총 부산지역본부가 공동으로 주최한 ‘날치기 노동법, 안기부법 전면 무효화를 위한 노동자 대회’를 끝낸 뒤 집회 참가자들이 평화적인 가두시위를 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비무장 상태인 노동자, 시민들을 곤봉과 방패로 무차별 구타하여 약 35 명의 시민, 노동자들이 부상한 사건이 발생했다. 1997. 3. 22. 에는 ‘고 류재을 열사 살인폭력 만행 규탄과 김영삼 정권 타도를 위한 남총련 결의대회’를 마친 남총련 소속 대학생 5 백 여명이 전남대 후문을 통해 거리로 나가려 하자, 경찰은 비무장 상태의 학생들 얼굴에 근접 최루탄 분사기를 분사하고, 심지어 진압봉에 돌이나 쇳덩이를 연결하거나 진압봉 여러 개를 연결한 일명 쇠도리깨와 쌍절봉 등을 무차별로 휘둘러 학생 20 여명이 머리와 가슴 부위에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경찰은 당시 경찰 병력이 개조한 진압봉 등을 사용한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모두 회수했다고 발표했다.

1997. 4. 28. 경찰은 ‘범청학련 투쟁선포식’을 이유로 서울대를 포위, 예비검색을 벌이던 중 서울대생 700 여명이 맨몸으로 교문 밖으로 나서다가 무장 전경과 사복체포조 500 여명이 돌을 던지며 학생들을 검거하려 하였다. 이어 벌어진 학생들과 경찰의 산발적인 투석전 과정에서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남윤국 군(19, 서울대 독어독문학 1 년)이 왼쪽 눈과 왼쪽 얼굴 광대뼈가 각각 파열, 함몰되고 왼쪽 앞니 5 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서울대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1997. 4. 28. 조선대학교에서 열린 범청학련 투쟁선포식에서는 경찰의 직격최루탄을 이마에 맞고 박민서 군(21, 전남대 경영학과 2 년)이 뇌출혈을 일으켜 전남대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는 사건이 있었다. 1997. 6. 1. 에는 서울 신당동에서 한총련 학생들의 시위를 구경하던 시민 이철용 씨(33. 건설노동자)를 전경 5, 6 명이 집단 구타하여 이씨가 두개골 골절과 안면골절로 인한 뇌출혈, 목뼈 등이 골절당하는 중상을 입는 사례도 있었다.

(3) 집시법의 자의적 적용

1997. 1. 26.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노동자 대회에 참석한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의 기획부장 김남곤, 권기혁 씨는 노동자 대회 참석시 사용하였던 플래카드를 영등포 경찰서 김한조 서장과 최한철 정보과장 등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그 과정에서 경찰 20 여명이 이들의 손과 팔을 꺾고 목과 팔을 조르는 등의 폭력을 행사당했다. 김남곤 씨등은 1. 28. 위 김한조, 최한철 씨를 강도 및 폭행죄로 남부지청에 고소하였다. 위 플래카드 압수 당시 경찰은 아무런 사유의 설명도 없었으나 차후 밝힌 바로는 위 플래카드가 신고한 시위용품이 아니므로 압수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위 노동자 대회는 적법한 신고를 마친 집회로서 폭력시위용품도 아닌 플래카드를 신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위법한 소지품으로 압수할 수는 없고, 나아가, 설혹 위 플래카드가 신고대상인 용품이라고 하더라도 미신고 자체에 대한 위반 문제는 별론으로 그 물품이 폭력행사용이 아닌 한 이를 경찰이 강제적으로 빼앗는 것은 명백한 강도행위에 해당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현행 집시법 제 6 조 제 1 항, 동시행령 제 2 조 제 8 항은 옥외집회 또는 시위를 주최하고자 하는 자는 그 시위방법을 관할 경찰서장에게 신고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 시위방법에는 장소의 약도와 진로 등을 포함하여 “기타 시위의 방법과 관련된 사항”이라는 모호한 규정을 두고 있어 경찰은 이를 근거로 광범위하고 자의적인 해석으로 여러 가지 시위 조건을 부과하고, 시위용품 등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압수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왔으므로 차제에 위 규정을 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조항으로 개정하든지 삭제하여야 할 것이다.

1996 년에도 8 월 8 일 개최된 민가협 주최의 ‘양심수 석방을 위한 행진’ 행사에서도 그 집회가 허가된 집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위참가자들이 집회신고서에 기재하지 않은 푸른 옷(수의)를 입고 밧줄(포승줄)로 묶인 상태에서 시위를 진행했다는 이유로 경찰이 시위행진을 가로막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이에 대하여 민가협등은 국가와 엄호성 중부경찰서장 등을 상대로 적법한 집회를 방해함으로 인하여 시위참가자들이 받은 정신적 고통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한 바 있었다. 1997. 8. 29. 서울지방법원 김홍도 판사는 “통상 착용하지 아니하는 죄수복 형태의 옷을 착용하고 포승으로 상호 결박까지 한 상태에서 시위를 하는 경우는 중요한 시위방법으로서 법이 정한 신고대상이라 할 것이고, 그러한 신고 없는 시위를 경찰관들이 저지한 것은 적법한 공무집행이다”라는 이유로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그러나, 위와 같은 판결에도 불구하고, 폭력 행사나 기타 시민생활에 상당한 위협과 불안을 끼칠 염려가 없는 단순한 의사표현적 방법의 하나인 의복 착용을 두고서 이를 신고대상으로 해석하고 그 미신고의 경우 당해 시위를 저지하여도 적법한 공무집행이라는 법해석은 헌법이 보장한 집회의 자유를 심대하게 침해할 수 있다는 법해석이라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어 위 집시법 시행령 제 2 조 제 8 항에 대한 위헌성 시비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한편, 1997. 7. 18. 서울지방법원 형사항소6부(부장판사 김영식)는 허가된 집회의 참석자들이 부당하게 연행된 것에 항의하며 경찰서를 항의방문한 윤용배(32)씨에게 벌금형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징역 8 월에 집행유예 2 년을 선고했다. 1996. 6. 13. 탑골공원에서 개최된 전국연합 주최의 ‘통일인사 석방 및 공안탄압 규탄 수도권 결의대회’는 허가된 집회였으나 경찰은 역시 참석자들이 집회신고서에 기재되지 않은 김영삼 대통령의 얼굴 가면을 들고 나왔다는 이유로 이를 불법집회로 간주, 최류탄을 발사하며 이를 해산시키고 현장에서 31 명을 연행한 바 있었다. 이에 6. 14. , 6. 15. 에 윤용배 씨등은 부당한 연행에 항의하며 은평경찰서를 항의방문 하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