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뉴스, 류제성 변호사 국가보안법 기사

2004-09-03 110

정녕 역사의 죄인으로 기록되고 싶은가?
“헌재와 대법원에 묻는다”

지난 8월 26일 헌법재판소는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찬양 고무죄 등)과 제5항(이적표현물 소지죄 등)에 대해 합헌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헌재)의 국가보안법에 대한 합헌결정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에 결정 자체가 그다지 놀라울 것은 없다. 그런데 헌재는 매우 이례적으로 그러한 헌재의 결정이 최근 정치권의 국가보안법 개폐논의에 반영되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요구사항을 발표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9월 2일 대법원은 찬양고무 등 죄로 징역 2년 6월이 선고된 한총련 대의원에 대한 상고심에서 이를 유죄로 확정하면서 역시 이례적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론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위법한 공권력행사와 법살의 공범

헌재와 대법원은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기관이다(적어도 교과서적으로는 그렇다). 우리의 사법역사가 비록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해왔고 법조계가 비리로 얼룩져 사법불신이 하늘을 찌른 지 오래지만, 그래도 우리 국민은 인권 보장의 최후의 보루로서 헌재와 대법원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못했다.

국민들이 사법개혁을 열망하는 것은 그만큼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남아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법부는 그러한 국민적 기대와 염원을 보란듯이 저버리고 있다. 분노가 치밀기에 앞서 참으로 안타깝고 착잡하기 그지없다.

전 국민을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시키고 정치적 반대파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하기 위해 제정된 국가보안법이 맹위를 떨치던 지난 독재권력 시절, 당신들은 국가보안법의 명백한 오남용을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적이 있는가?

오히려 고문과 조작에 의한 증거와 자백을 모두 인정하고 검찰 공소장 및 구형과 글자 한자 다를 바 없는 ‘정찰제 판결’을 일삼아 왔을 뿐이다. 그로 인해 참으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간첩’으로, ‘빨갱이’로, ‘반정부주의자’로 매도되어 구속되었고, 심지어 사형집행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사법부는 그러한 국가의 위법한 공권력행사와 법살의 공범이었다.

독재권력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 독재권력 시절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더 사법부는 권력의 횡포에 제동을 걸고 국민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어야 한다.

‘민주화’된 지금이라고 해서 국가보안법의 위험성은 줄어들지 않았다. 물론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고 북한 응원단을 우리나라 국민들이 열렬히 환영하는 요즘과 같은 분위기에서 과거와 같은 살벌하기 짝이 없는 국가보안법의 적용은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송두률 교수 사건에서 보듯이 국가보안법은 멀쩡한 교수를 하루아침에 ‘희대의 간첩’으로 바꾸어버리는 괴력을 여전히 발휘하고 있다. 대학생들의 적법하고도 민주적인 선거를 거쳐 학생대표로 선출된 한총련 학생들은 아직도 ‘이적단체’에 가입한 죄로 수배되고 구속되고 있다.

설사 단 한 명의 희생자 밖에 없다 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은 존치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그 한 명을 위해 폐지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은 입법부의 의무이고, 폐지 전까지 최대한 헌법정신에 합치(!) 하게 엄격하고도 제한적으로 해석, 적용하는 것이 법원의 의무이며, 위헌제청 되었을 경우 위헌판결을 내리는 것이 헌재의 의무이다.

헌재와 대법원은 직무유기중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떠한가?
국가보안법 폐지의 열쇠를 지고 있는 열린우리당은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기만적인 개정론을 흘리고, 헌재와 대법원은 국가보안법이 필요한, 정당한, 합헌적인 법이라고 강변하며 혹시라도 폐지될까봐 입법부를 향해 훈수를 두고 있다. 입법부는 의무이행의 의지가 약하고 사법부는 입법부의 의무이행을 방해하고 있는 꼴이다. 모두가 직무유기중이다.

헌재와 대법원의 이번 결정과 입장표명은 내용적으로 볼 때 시대착오적이고 퇴영적이며 일방의 편향된 견해만 따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차와 형식에 있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남북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애써 외면하면서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는 것은 우리의 사법부가 냉전적인 반공이데올로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권옹호와 헌법수호의 의지가 얼마나 박약한가를 드러내고 있다.

한편 입법부를 향해 훈수를 둠으로써 스스로 권력분립의 원칙을 어기고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고 있다. 지난 대법관 제청파동과 최근 김영란 판사의 대법관 임명을 앞두고 일어난 법원장급 판사의 퇴임 등에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의 목소리, 사회 개혁과 진보를 바라는 목소리를 대변하라는 시민단체의 요구에 대해서는 사법권 독립과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차라리 침묵하라

나는 이제는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리라 믿는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피와 눈물로 바라왔던 일, 17대 국회가 이러한 국민적 염원을 저버리는 배신행위를 감히 감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리 국민들이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에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 없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된 후에, 국가보안법으로 인한 피해자들의 명예가 회복된 후에, 국가보안법 오남용의 과거사가 명명백백히 규명된 후에, 국민들은 당신들에게 준엄하게 물을 것이요 당신들을 심판할 것이다.

정녕 역사의 죄인으로 길이 남을 명예(?)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제 살을 깎는 뼈아픈 고해성사를 하지는 못할망정 국가보안법 폐지논쟁에 차라리 침묵하라. 그것이 당신들의 죄값을 조금이나마 깎는 길이 될 것이다.

– 통일뉴스, 2004. 9. 2. 류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