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모임]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2015-03-25 1

오찬호 著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오현정 회원

  2007년, <88만원 세대>는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월 88만원’의 예산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20대의 구조적 운명을 이야기하며 모두가 짱돌을 들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른바 ‘20대 개새끼론’은 20대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연대하지 않기에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2013년, 오찬호 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지금의 20대가 이 막막한 경쟁의 틀 속에서 왜 차별에 대해 문제제기도, 연대도 하지 않는지-아니, 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설명한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분명히 저는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과제들을 남들보다 수월하게 수행해 온 편입니다. 하지만 수강생이 13명밖에 안 되는 수업조차 A부터 D까지 줄을 세우는 엄격한 상대평가 속에서, 불친절한 수업들로 처음 법학을 접하고 2달 만에 사례 문제를 시험지에 풀어 써내야 하는 상황에 이르자 경쟁이 삶의 몸통을 조여오기 시작했습니다. 학생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유급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혹한 상대평가 제도를 확립하는 방식의 훈육만을 신뢰하는 ‘교육 없는 교육 현실’ 속에서, 이 ‘공부 아닌 공부’의 귀결이 타인을 짓밟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면서도 오로지 밀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도서관 칸막이에 몸을 옹송그리던 그 순간마다 저는 경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고 편협하게 하는지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20대는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론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20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먼저 세심하게 살피고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건강해질 수 있는지 고민하는 이 책을 함께 읽고 싶었습니다.

이 책이 그려내는 팍팍한 풍경이 20대만의 문제이겠는가 하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세대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직면하는 요즈음 우리 사회의 모습은 분명 누구에게나 나름대로 가혹하며, 나름의 기득권을 가진 자 위에는 항상 더욱 더 가진 자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최근 십 여 년 간 급속히 가속화된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달려 오다가 글로벌 경기 침체라는 거대한 장벽을 만나, 이 모든 괴로움은 어쩔 수 없으니 조용히 받아들이라는 강요를 각자 나름의 위치에서 감내하여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노조를 만들거나 소속되는 것도 힘든 비정규직은 부당해고와 노조 탄압을 문제 삼으며 사측과 정부로부터 철퇴를 받는 정규직을, 소위 ‘취준생(취업준비생)’은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비정규직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연대’의 가치를 잊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토록 불행한 세상에서 불행을 경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항상 윗세대가 유독 ‘20대’가 어떠해야 한다고 말해 온 것은 우리 역사에서 20대가 항상 시대의 모순에 가장 먼저 저항하고 돌파하는 역할을 해 왔던 점에서 기인하는 기대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20대가 그러한 윗세대의 훈계 아닌 훈계를 ‘꼰대’라고 비꼬는 것은 그만큼 20대-특히 대학생이라는 일종의 사회적 지위를 구성하는 물적 토대가 급격히 달라졌고 그 위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대의 공기를 호흡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실은 이러한 기대와 불만 사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며, 앞으로 30년간 우리 사회를 가장 주도적으로 만들어 갈 20대의 삶에 대해 특별한 고민을 기울이는 것은 유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20대는 구조적으로는 정규직이 급격히 줄어드는 신자유주의 사회에 맨 몸으로 내몰려 있는 최대 피해자라고 할 수 있으며(박노자, <비굴의 시대>, 23면), 비참하든 아니든 직접 경험을 할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공부-경쟁을 통한 계급 상승이라는 부모님 세대의 오랜 염원을 내면화하며 영원히 준비만 하고 있는 세대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온갖 모순을 왜곡된 형태로 받아내고 있는 세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의 20대가 지나온 시간들은 집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성적이 좋든 나쁘든 나름의 방식으로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꽉 짜여진 경쟁 체제에 얽매여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열 살 안팎의 나이에 IMF를 헤쳐나오기 위해 다급히 살았던 부모님을 보며 자란 지금의 20대는, 그 위기에 대해 돌아볼 여유도 없이 자라나 취업대란과 장기적인 경기 침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대학에 입학했을 때 학생사회는 이미 동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에너지 넘치는 스무 살 스물 한 살은 각자 살 길을 찾아 스펙을 쌓고, 인맥을 관리하며 고등학교 4학년, 5학년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과로사하는 학생들의 소식이 종종 들려올 정도로 힘겹게 스펙을 쌓고 수십장의 자기소개서를 보내고도 취업을 할 수가 없어 그러한 삶을 연장합니다.

2년 전 어느 날 아침 학교 셔틀 버스 안에서 한 뉴스를 들었습니다. 한 명의 여중생이 자살하였으며 유서에는 “공부를 해도 원해는 것을 이룰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는 뉴스였습니다.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지만, 이내 공감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절망감이 팽배한 것은 우리 사회에 목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뢰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에는 다만 ‘개인’이 죽도록 노력해서 계급 상승을 이루는 수밖에 없다는 강박이 있을 따름입니다. 학교, 군대, 회사라는 거대한 조직의 위계질서가 일상에 녹아 있을 뿐 목소리를 내어 바꾸고 싶을 만큼 애착을 가질 수 있는 ‘공동체’조차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가장 역동적이었던 공동체가 대학에서의 학생 사회가 아니었을까 싶지만, 지금의 20대는 그런 의미에서의 공동체와 함께 무언가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연대를 상상하기보다는 지금 가지고 있는 보잘 것 없는 지위라도 과시하여 경쟁자들과 자신을 구별 짓는 데 익숙해진 것입니다.

각자의 세대가 처한 문제들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잘 풀어낼 수 있는 것은 분명히 그 세대의 사람들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이러하여 우리는 사정이 극히 어려우니 그저 절망하고 있더라도 이해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청춘들을 점점 극단적인 경쟁으로 몰고 가 고립시키는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 사회의 향후 30년이 건설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함께 보다 나은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허물어진 ‘공동체’를 복원하고, 그 공동체 안에서 함께 목소리를 내어 그 곳을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의 ‘정치’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 구체적인 경험들을 통해 좀 더 나은 사회를, 좀 더 행복한 삶을 함께 꿈꿀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갑갑한 현실일지라도-끊임 없이 읽고, 고민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바람들을 이루어나가겠다는 희망으로 글을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