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태령 대첩의 산증인이 되고 싶어서
(24.12.22. 인권침해 감시단 활동 후기)
– 최나빈 회원
12·3 내란 사태가 일어난 이후부터 당일에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에게 부채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해야겠다 싶어서, 민변 집회·시위 지원단에 들어가 인권침해 감시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24.12.21. 토요일은 광화문에서 집회가 있는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건강 문제로 감시단 활동에 참여하지 못했는데, 일요일 새벽에 SNS를 통해 남태령에서 집회가 이어진다는 소식을 발견했다. 오전 6시쯤 남태령에서 밤을 지새운 사람들이 첫차를 타고 귀가하면서 인원 보충이 필요하다는 글을 봤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말벌 아저씨처럼 튀어 나갔다.

[남태령 도착 당시 재밌는 깃발]
오전 8시 30분이 채 되지 않았을 시각, 남태령에 도착했다. 집 밖을 나왔을 때 바람이 차서 놀랐는데 남태령은 더 추웠다. 주위에는 밤을 지새운 걸로 보이는 사람들이 길에 앉아 있거나, 무대 주변에 서 있었다. 날이 완전히 밝아오기 전이어서 살짝 어둑했다. 뚫린 사방에 보이는 건 산이었고 스산하고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반면 현장의 분위기는 달랐다. 사람들이 지쳐 있기는 해도, 씩씩한 기세로 똘똘 뭉쳐 있었다. 무대에서 흥겨운 음악이 나오면 다들 몸을 흔들고, 구호와 함께 “투쟁!”을 외쳤다. 시민 발언을 위해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시작하는 발언들과 그런 외침에 환호하며 환대하는 동료 시민이 있었다.

인권침해 감시단으로 참여했기에, 민변 변호사님들과 주변 상황을 살폈다. 그러다가 남태령 고개 방향에 가게 됐다. 오후 2시에 있을 집회를 위해 스피커 등의 장비를 실은 차량과 난방 버스(정확한 기억인지 모르겠지만 두 대의 차량이었던 것은 확실하다)의 진입을 경찰이 막고 있었다. 경찰은 ‘결정권자가 없다, 정보관에게 확인해 봐야 한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갑자기 차량 두 대 진입을 허용해달라고 요청하던 집회 참가자 측과 어떠한 근거도 없이 그저 차량 진입은 안 된다며 거부하던 경찰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경찰들은 캠을 들이밀거나 저지한답시고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끌어내는 등 유형력을 행사했고, 그 과정에서 동료 변호사님도 경찰에게 밀려 넘어지고 안경이 부서지는 등 피해가 발생했다.

[굳이? 싶었던 진압 방패]
결정권자가 없어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며 변명만 늘어놓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항의와 요청에 대해 무반응으로 대응하던 경찰, 충돌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 상황을 중재하거나 막으려고 하기보다는 여기저기서 캠을 들고 와서 채증부터 하던 경찰, 본인의 관할이 아니라며 거짓말했던 사복 입은 정보관, 변호사보다 법 공부를 많이 해서 아는데 이건 불법집회라서 차량을 못 들여보내 준다던 경찰. 그날 내가 보고 듣고 기억하는 경찰들의 모습이다.

[유튜버냐고 묻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 목격자라 할 수 있는 시민들이 많이 없었다. 그래서 경찰들이 눈치를 덜 봤던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한 대의 버스는 진입하지 못한 채, 충돌도 소강 국면에 이르렀다. 다시 집결지로 돌아와서 상황을 둘러보다가 행진이 있기 전에 자리를 떴다. 바람이 차고 추웠는데, 사람들은 뜨겁게 어우러졌다. 나는 다음 날 현장에 왔기 때문에, 2024년 12월 21일 농민과 시민이 어떤 마음으로 연대하고 서로를 의지하면서 어둡고 추운 밤을 이겨내었는지 가늠할 수도 없고, 감히 그 마음을 헤아릴 수도 없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고, 그로 인해 우리 사회가 달라질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오던 삶에 대해 서로 이야기 나누며 힘이 되어 주는 경험을 한 사람은, 이를 몰랐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동지로서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의 감정을 보듬으면서 투쟁해 나갈 것이다.

남태령은 사방이 뚫려 있어서 햇빛이 직사광선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내 눈이 부셨다. 의미를 부여하자면, 나에게는 마치 연대가 빚어낸 눈부심처럼 느껴졌다. 건강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객기를 부려서 남태령에 왔고, 귀가해서 고열에 시달렸다. 하지만 다음날이라도 현장에 가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역사의 현장 속에서 나 하나가 모여 우리가 되는 순간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었다.
Post Views: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