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4년 간의 임기를 마감하는 백승헌 민변 회장과의 인터뷰

2010-05-27 204


 민변은 5월 29-30일 제23차 정기총회를 갖고 새로운 집행부를 선출한다.
동시에 백승헌 회장을 비롯한 현 집행부의 임기는 마무리 된다.
시작과 마무리, 두 가지를 맞이하는 민변 집행부와 사무처는 최근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백승헌 회장을 만난 날은 그의 임기 만료 닷새를 앞둔 날이었다. 4년 간 민변 회장을 맡아온 터라
할 이야기가 무척 많을 것 같았다. 게다가 백 회장은 민변의 22년 역사를 지켜온 창립 멤버이다.
1988년 창립당시 51명이었던 회원은 현재 637명으로 늘어났다.
스물다섯 살의 신참 변호사였던 백 회장은 민변과 함께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촛불시위 등 민변이 맞닥뜨렸던 굵직한 사건과 변호사로서의 활동에 대한 소회를 듣고자 했다.
그러나 ‘퇴임사’같은 내용으로 이끌고자 준비한 인터뷰는 첫 질문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백승헌 회장은 그간의 소회에 대해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했다.
또 아직 임기가 닷새 남은 만큼 소회는 나중에 해도 충분하니 “남은 시간에는 앞만 보겠다”고 했다.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현재에 충실하고, 앞을 바라보는데 더 가치를 두는 사람이라고
백 회장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내리는 순간, 그가 쐐기를 박았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아주 분통이 터져요. 내가 아직 청년인데!”
인생 선배로서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특유의 시원한 너털웃음이 뒤따랐다. 임기를 마친 백승헌 회장은 민변의 일반 회원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향후 활동이 더 기대되는 것은 그가 ‘청년’이자 청년 정신을 한 몸 가득 안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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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립 멤버로 민변 활동을 시작하셨고, 1996~1998년 사무국장, 2003~2006년 부회장, 2006년부터 현재까지 회장을 맡으셨습니다. 민변이라는 단체의 변화상을 직접 겪어오셨는데요, 민변이 사회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한 생각을 말씀해주십시오.


 민변의 역할은 크게 시민사회단체, 변호사단체, 전문가단체, 인권단체의 네 가지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네 가지 역할이 상호 긴장 속에 서로를 보완하면서 지켜져 왔고, 민변에 대한 평가에도 네 가지 시각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일반 사회가 변호사를 익숙한 존재로 받아들이지만, 민변 창립 당시 변호사 집단은 폐쇄적이고 특권적이라고 규정되곤 했습니다. 제가 개업할 당시인 86년에, 서울지방변호사 등록수가 670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민변이 다른 변호사 단체에 비해 좀 더 개방적이고 시민사회와 소통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금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이에 대해 꾸준히 문제의식을 가진 결과, 촛불시위 과정에서 시민과 소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사회단체로서의 역할을 견지하는 동시에 ‘인권을 말하는 변호사 단체’라는 기존의 성격이 강화되어야지 민변이 더 충실해질 것 같습니다. 


– 연임하셔서 총 4년간 회장직을 맡으셨습니다.

 제가 무능해서 2년 동안 할 일을 4년에 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96년부터 2000년까지 연임하신 최영도 변호사께 누가 되는 발언이라 안 되겠군요.(웃음) 전임회장이 잘했다는 평가를 받으려면 유능한 신임회장을 모셔야 하는데, 지난번에는 그것에 실패했습니다. 재취임 할 때 “2년 후에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했었는데, 이번에는 회장 후보를 모시게 되어 다행입니다.


– 취임하실 때 재임기간의 목표로 제시하신 것이,
  1) 초심을 잃지 않는 민변 2) 대안제시기능의 강화
  3) 대규모 단체로서의 내적 질서 수립  4) 다가가는 민변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평가하십니까?

 
‘초심을 잃지 않는 민변’은 ‘운동성의 유지’를 말합니다.
조직이 오래되면 정체되거나 타협하기 쉽기에, 초기의 건강한 운동성을 유지하자는 뜻으로 제시한 목표였습니다.
 ‘대안제시 기능의 강화’는 민변의 발전을 전제로 한 겁니다. 탄압에 방어하는 동시에, 새로이 구성될 사회질서에 적극적인 의견 제시를 하자는 말입니다. 지금과 같은 역행 국면에 대안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방어만 하기에도 급급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역행국면이 끝나면 언젠가는, 그 방어의 역량이 민변이 가진 가치관을 펼칠 수 있는 준비로 이어져야 할 것이라는 측면에서, 계속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규모 단체로서의 내적 질서 수립’은 상근 변호사제의 도입으로 발전의 토양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고요.
 ‘다가가는 민변’은 시민사회에의 개방성을 뜻합니다.

 평가에 관해서라면, 다른 분들의 평가는 달게 듣겠지만, 저 스스로는 아직 평가를 보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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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정부 당시 방금 말씀하신 것과 같은 비전을 가지고 취임하셨습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상황의 변화와 함께 어려움을 겪지는 않으셨는지요.  

 
이명박 정부의 출범은 민변에 ‘외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서 받은 외적 충격은 민변을 각성시키고 스스로를 성찰하게 한 것 같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사회 연대활동을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어요. 참여정부에 많은 회원들이 참여하면서 긍정적, 부정적 측면이 동시에 발생했죠. 권력에의 동참이 꼭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는 NGO로서의 민변에 일종의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도전에 제대로 대응하기가 쉽지 않았죠. 그러나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삼성특검이나 한미 FTA 문제 등에서 볼 수 있듯,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고 적극적으로 다퉈나가는 구별의 정신을 기본적으로는 세웠다고 판단합니다.


– 민변에서는 촛불집회 2주년을 맞아 <민변 촛불백서>를 발간했는데요,
  촛불 시위와 민변의 역할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반론의 여지없이, 제 재임기간 중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지난 4년간의 사회 변동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일 것이고요.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시민사회가 민변에 의탁하고 활동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각인시킨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민변 회원들이 촛불 집회 당시 민변의 역할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부심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촛불은 완결된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차분히 반추하면서 제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도 촛불을 소화해야하고, 민변도 소화를 계속 진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 민변은 시민사회단체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회원 단체이기도 합니다. ‘공부모임’을 만드는 등
 對 회원 사업에 신경을 쓰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를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질문자께서 신경 썼다고 평가를 해주신다면 감사할 일이지만, 신경을 쓴 것에 비해 가시적 성과가 뚜렷하지는 않습니다. 집행부로서는 항상 부족하다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원들이 어렵게 가입하고, 적지 않은 회비와 시간을 내주심에도 불구하고, 민변이 얼마나 회원들에게 다가갔는가의 여부는 아직 진행형입니다. 발전의 여지가 많고, 또 발전해야하는 부분이죠. 민변은 공공의 가치관을 기초로 한 단체인 만큼, 다른 단체들보다도 회원들 사이의 연대감이 강해야 합니다. 집행부는 그 매개가 되어야 하고요. 변호사 개업 여건의 변화와 변호사의 수적 팽창을 고려할 때, 앞으로는 연대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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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세에 변호사 개업을 하신 후, 지금까지도 최연소 기록을 보유하고 계십니다.

 
대학 4학년 때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개업이 이른 편입니다. 연수원 생활을 하면서, 판사나 검사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변호사가 적성에 맞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사무실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큰 고민이었지만, 개업 변호사를 선택한 덕분에 민변 활동을 할 수 있게 됐지요.


– 민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정법회 회원으로 활동하시다가 1986년 민변 창립을 함께 하셨습니다.
  민변 창립에 관여하게 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기본적으로는 시대적 당위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3개월 남짓 대학 1학년 생활을 하고난 나머지는 다 휴교 상태였습니다. 80년대에 학생문화를 겪은 데다가, 변호사 개업을 한 86년까지도 연장선상의 정권이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에게는 큰 고민 없는 자연스러운 경로였습니다.

 변호사 개업을 하고 나서 얼마 후에 87년도에 6월 항쟁을 겪었습니다. 정법회 선배들이 변호사협회 건물에서 농성을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저도 찾아갔습니다. 정법회 활동은 민변 활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함께 시위를 하는 과정에서 선배 변호사들이 제게 시국 사건을 맡아보라고 권유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변호사가 적은 반면 시국 사건 수는 무척 많았어요. 학생 시위사건, 조직 사건, 각 노동 사업장에서 양산된 사건들이 줄을 이었고, 이를 변론하기 시작했습니다. 민가협에서 세어봤더니 제가 시국 사건을 가장 많이 맡고 있던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젊다고 표현하기보다 ‘어리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았던 저에게, 사건을 위임하신 분들은 ‘대체 무엇을 보고 중요한 일을 맡기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지식이 짧고 경험이 없어, 지금 입장에서 보면 부족하고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은 것들이 아직도 가슴에 부담으로 남아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경력이 꽤 쌓인 변호사가 된 지금도 가끔 그 때의 경험을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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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세에 개업하신 이후로 쉼 없이 달려오셨습니다, 꾸준히 사회 운동을 하도록 만든 동력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시대적 당위, 그리고 더 열심히 운동하고 고생하시는 분들에 대한 채무감이 동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부인이신 정연순 변호사도 민변 회원이시고, 사회 활동 또한 활발히 하고 계십니다.
  두 분이 어떻게 만나셨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

 
제가 변호사 개업을 하고 있을 때 옆방에 시보로 와서 알게 된 사이입니다. 정연순 변호사가 시보를 끝낼 무렵에 데이트를 시작했지요. 나중에는 저와 같은 사무실에 취업하게 되었고요. 결혼 16년째인데 연애 이야기를 하려니 아득하네요.(웃음)

 정연순 변호사는 학생 운동을 했었고, 변호사를 지망한 이유도 민변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치관이 비슷하다는 것도 연애를 하는 데 도움이 되었죠. 제가 다섯 학번 위이고 연수원 기수도 더 위인 선배 변호사라, 대부분은 제가 정 변호사에게 도움을 줬다고들 생각하는데, 역으로, 저는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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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백승헌 변호사와 정연순 변호사는 사무소를 같이 쓰고 있다.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잠깐 가질 수 있었다.]  



– 자녀들과 대화를 많이 하시는 편이신가요.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아이들이 한창 사춘기입니다.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들이 다들 그러하듯이, 대화를 많이 하려 하지만 부족하다고 느껴요. 요즘엔 내가 사춘기 때 어땠는지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스스로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독립적인 인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자신만의 세계 독자적으로 구축해서 그에 따라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세상인 것 같습니다.


– 회장직에 재임하셨던 동안을 한 번 돌아봤으면 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 가장 아쉬웠던 일 등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이제 닷새 남았는데, 남은 기간에는 앞만 보려고요. 소회는 천천히 해야 할 일 같습니다. 다 끝나고 나서
반추해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민변 회장 4년과 함께 만 25년 동안 변호사를 했기 때문에 한 번쯤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 차기 집행부에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요.

 독자적인 색깔을 가지고, 나아가시면 될 겁니다. 그 이상의 드릴 말씀은 없어요.


– 인생의 선배로서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아주 분통이 터져요. 내가 아직 청년인데!!(웃음) 저 스스로에게 말한다면, 기본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가치를 일상생활 속에 어떻게 녹일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청년들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앞에서 말한 것과 똑같이, 닷새 후에 생각해보겠습니다.



 








 – 인터뷰 / 홍보출판팀  이재정 변호사, 김란아·박초롱  인턴
– 정리 / 홍보출판팀 박초롱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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