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랑고시랑] 겨울이 좋다, 얄궂게도 여전히

2011-12-15 222


[고시랑고시랑]


겨울이 좋다, 얄궂게도 여전히



글_이재정 변호사


나는 사계절 중 겨울을 가장 좋아한다.

물론,
노오란 봄, 그 환한 시작의 설렘도 좋아한다.
자유로운 바다내, 농익은 초록, 그 터질 것 같은 열정의 여름도 좋다.
땅 위에 내려앉은 노을, 그 안에 영글어 잇는 것들이 풍요로운, 가을도 참 좋다.

그래도 ‘겨울’만한 것이 없다.
내 추억에 겹쳐진 따뜻한 겨울의 기억들. 그 안에서 난 늘 행복하다.

내게 겨울은 아랫목의 기억이다.
방 한 귀퉁이에 밤낮으로 깔아 놓은 이불 밑에서, 내놓은 얼굴은 입김을 불어내고, 등은 뜨거워 몸을 뒤척이던 아랫목의 기억. 가학적 쾌감과 겹쳐진다. ^^;; 그 유난히 춥던 겨울 새벽녘, 연탄불 갈러 나가시던 할머니의 뒷모습을 빼놓을 수 없다. 손주 녀석들 깰까, 살짝 열리곤 이내 닫히던 방문이었건만. 할미 속 몰라주고 순식간에 들이닥친 시린 공기. 그 찬 기척에 눈떠져 잠결에 보게 되는 할머니의 뒷모습도 아련하고 따뜻한 내 유년의 겨울 추억이다.

기쁜 성탄, 크리스마스의 기억도 겨울이다.
TV 속 분주하고 화려한 연말은 남의 일이었다. 골목에 모여 늘 하던 놀이로,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그저그런 하루하루를 보내던 나와 내 친구들. 이날 만큼은 함께 손잡고 동네 꼭대기 빨간 십자가 교회당으로 마실1)간다. 화려한 등 켜진 리본 장식의 성탄나무, 성스러운 캐롤, 텔레비전 안에서 보던 그것들이다. 평소엔 관심도 없었던 아기 예수의 탄생이 정말로 기뻤다. 성탄전야, 교회를 나서는 우리들 손에는 과자주머니가 한 꾸러미씩 들러져 있었다. 아… 정말 기쁘다. 이 구주 오신 날이.

그리고 방학.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있는 기억이지만, 유난히 겨울방학이 좋았다.
겨울 아침, 따신 이불 속을 털고 일어나 도살장에 끌려가듯 학교 가던 일. 그 무거운 발걸음만큼 더 반가운 것이 겨울방학이다. 게다가 여름방학보다 길다. 그렇지만 다른 이유 다 합쳐도 못 견줄 가장 큰 이유는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잇다는 것이었다. ‘아빠가 좋아하시겠지?’ 선생님께 받은 성적표는 오로지 그날을 위해 존재할 따름이었다. 그무렵, 사업에 실패하고 먼 타지에 혼자 계시던 아버지는 늘 바쁘셨다. 철따라 기복있는 일을 하셨던 관계로 겨울이 아니면 오래 함께 있을 수 없었다. 일없는 겨울에 시름만 늘었을 당신이셨을텐데… 늘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안아주셨다. 아빠 곁 잠자리를 걸고 매일 밤 동생과 가위바위보를 한다. 아빠를 차지하면 더 바랄 것이 없던 우리. 그렇게 철없던 우리는 그저 우리 곁에 있는, 그 웃는 아빠가 좋았다.

마지막으로 눈. 난 겨울의 포! 근! 한! 눈이 좋다.
손에 닿으면 이내 녹는 눈이라서 그런가. 난 그 눈이 차다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교과서나 책에서 읽는 눈도 늘 포근했다. ‘소복소복’, ‘뽀드득 뽀드득’, ‘펑펑’. 눈을 표현하는 그 어떤 의성어, 의태어가 차갑고 아린 적 있던가. ‘하얀 꽃송이’, ‘솜털’, 눈을 은유하는 것들도 하나같이 따스하다. 그것에 더하는 기억들이 잇다. 밤새 눈 내린 새벽, 할머니는 우리가 잠에서 깨기도 전에 골목길 눈을 쓸어 한쪽으로 쌓아두셨다. 그런 겨울 아침이면 집 앞 골목엔 여러 개의 눈더미가 여기저기 수북해져 있었다. 그 눈더미로, 우리는 아빠를 졸라 눈사람을 만들었다. 할머니가 새벽녘 꺼내 놓으신, 하얀 연탄재는 눈사람 씨앗이다. 연탄재가 눈밭에 구르면서 어느 새 커다란 눈사람이 되었다.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그 겨울의 ‘눈사람’, 그 낯은 부처같이 온화했다. 다시 봄이 오고 아빠가 떠나도, 그 눈사람은 늘 그대로 내 곁에 있어줄 것 같았다. 봄이 채 오기도 전에, 눈사람은 녹아 사라졌다. 늘 그립다. 그 눈사람도… 아버지도…

추억인 듯 환영인 듯, 내게 겨울은 따스함이다.
탄불 갈러 가시는 할머니의 뒷모습과 뜨신 아랫목. 마을에서 제일 밝고 높은 십자가와 사탕꾸러미,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눈사람.
아직도 내 겨울의 기억에는 온기가 남아있다.

그런데…
‘어느 계절을 좋아하세요?’
누군가 내게 물으면,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철이 들면서,
서러운 겨울을 알게 된 것이다.
연탄가는 추억속의 새벽이, 여태 오늘인 사람들이 있다.
새벽 인력시장, 노가다 봉고차에 수거되지 못한 채로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맘에 동이 터 밝아와도 자리뜨지 못하고 서성이던 몸뚱이들, 그 몸뚱이들의 서러운 겨울 아침을 안다.

내 유년의 기억 속, ‘단칸방 셋방살이의 서러울 겨울’에 온기를 주던 추억들 – 연탄불 가는 할머니의 뒷모습과 그 품속만큼이나 따스하던 아랫목, 아버지, 그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따뜻한 눈의 눈사람 – 도 그들에겐 없다. 게다가 그것만으로 위안받기엔 이 겨울의 현실은 너무 시리다. 누군가의 아버지였을 그들의 대부분은, 이 겨울에도 그리고 봄이 와도 아이들에게 돌아갈 수 없다. 열차 끊어진 지하철 2호선 을지로 2가역 역사에서 몸 뉘는 그들은, 이른 새벽이면 다시 시청 앞 뒷 골목 인력시장을 서성인다. 밤새 화려한 룸싸롱 네온싸인들이 가득하던 그 거리에, 오늘도 서러운 겨울 아침 해가 뜬다.

그래도 난 여전히 겨울이 좋다.
얄궂다.

36.5도의 열덩어리 옆 사람을 증오하게 만드는 여름 징역보다는 겨울이 낫다고 한 신영복 선생님 글이 스친다.
모로 누워 칼잠자며 부대끼는 그들끼리 의지하는 그 온기. 고작 36.5도.
서러운 감옥살이가, 이 서러운 겨울이 ‘좋다’ 할 수 있는 그 온기 고작 36.5도.
아… 나는 겨울이 좋다.
서러울지언정, 내 가진 고작 36.5도 온기나마 시린 가슴에 포갤 수 있다면.

나는 겨울이 좋다.
어린 시절 단칸 방 셋방살이의 따스한 아랫목도, 눈사람의 포근함도,
모두 36.5도 였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나는 겨울이 좋다.
얄궂게도 여전히.

1) 마을의 방언. ‘마실간다’: 이웃에 잠깐 다니러 가는 외출을 칭하는 말.